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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가 휩쓸고 간 공장 마당에는 불타다 남은 샌드위치 패널, 집기들이 시뻘겋게 산화한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발길이 끊어진 공장 입구 쪽으로는 곰팡이가 자리 잡았다. 점점 망가지는 공장을 바라보는 노동자들의 속도 같이 타들어 간다. 여기는 폐업 후 청산인이 철거하려 하는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이다.
공장 입구 우측으로 마련된 노조사무실로 가는 길. 바스라져 가는 공장과 달리, 색색의 종이와 선전물이 펼쳐진다. 사무실 창으로 사람들의 온기와 소란스러움이 새어나온다. 이들은 공장 폐업에 반대하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와 그들과 함께하는 아사히글라스(AGC화인테크노코리아), KEC 노동자들이다.
추석 연휴 앞두고, 한국옵티칼 투쟁기금 전달
해고 이후 아홉번째 추석 맞는 아사히 노동자의 연대
26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노조 사무실에는 평소보다 좀 더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다. 연휴에도 공장 철거 시도를 저지하고자 사무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민주노총 경북본부는 이날 투쟁기금 전달과 연휴 간 힘을 돋우기 위한 식사 준비도 손수 했다.
점심시간, 조합원 2명 생일상으로 잡채를 준비했다는 말에 호응이 나왔다. 오는 길에 가을 전어 무침회도 준비했다고 하자 환호가 나왔다. 해고되고, 폐업해 일자리가 사라지고, 투쟁 중인 노동자들은 연휴를 소박한 점심식사로 기념했다.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들은 해고 이후 아홉번째 추석을 맞는다. 해고자로서 맞는 명절의 쓸쓸함과 어색함이 익숙해질 법한 시기. 이들은 해고자의 명절 스트레스를 알기에, 아사히글라스 앞 농성을 이어가면서도 한국옵티칼 노조 사무실에도 발걸음을 이어간다.
폐허가 된 공장을 지키는 노동자들
아사히글라스-한국옵티칼 투쟁의 연결고리
국내 진출한 일본기업 소속 노동자란 공통점
“연대는 ‘기쁨’···받은 걸 나누는 것”
한국옵티칼 노동자 배현석(37), 박정혜(37) 씨는 이번 연휴 농성 담당을 좀더 맡았다. 차례를 안 지내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공장 폐업 후 해고 상태에서 명절을 맞기는 처음이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가족 모임이 줄면서 명절에 가족과 부닥칠 부담이 줄었다. 화재 소식을 어렴풋이 아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버거웠던 차다. 아사히글라스 해고자 오수일(50), 안진석(51) 씨는 허드렛일이라도 거들러 왔다가, 명절을 무탈히 넘기는 노하우를 전파한다.
현석 씨는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을 보는 심정이 복합적이다. 같은 지역에서 노조 결성 직후 문자로 하청노동자 178명을 일시에 해고한 사건이 있었지만, 본인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리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옵티칼에는 노조가 없었고, 쏟아지는 물량에 월 2~3일 쉬고 만근을 할 정도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6년 노조 설립 이후, 물량 감소 같은 상황에서 희망퇴직을 받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노조는 희망퇴직을 수용했다.
그즈음부터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도 한국옵티칼 상황을 인식하고 조언도 전했다. 노조가 타협하고 물러서기 시작하면 결국 투쟁이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현석, 정혜 씨처럼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공장에 남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다시 정비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과 본격적으로 알아간 것도 이때부터다.
“본격적으로 투쟁이 벌어질 때 돌아보니 어딜 가도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분들이 보였어요. KEC(금속노조 KEC지회)에서도 오셨고. 8월 초에 공장 철거한다며 인부들이 왔을 때 우리는 상황도 잘 모르고 얼떨결에 연락을 돌리다 보니, 가장 앞줄에 달려와서 서신 분들이 KEC와 아사히예요. 우리는 오히려 뒤에서 우물쭈물했죠. 그거 보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현석)
“저희도 겪어봤잖아요. 처음 일이 벌어지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막막하고 힘들 때 우리는 KEC에서 배웠어요. 그리고 그 뒤에 우리 싸움에 함께 연대하는 많은 사람에게 배웠죠. 그들에게 받은 걸 전하러 온 것뿐이에요.” (수일)
하지만 이들의 끈끈한 관계는 ‘연대’ 하나 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아사히글라스와 한국옵티칼 문제에는 닮은 점이 많다. 이들은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대한 투쟁이며, 투쟁 과정에서 공권력과 싸우게 되는 일도 많았다며 되짚는다.
아사히글라스와 한국옵티칼은 모두 모기업이 일본 기업이다. 세금·임대료 등 혜택을 받으며 구미에 입주했다. 아사히글라스는 구미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한국 시장 진출이라는 성과를 냈고, 동시에 공장 부지 50년 무상임대, 세금 감면 등의 특혜까지 덤으로 받았다. (관련 기사=MB가 ‘강추’한 일본 전범기업 아사히글라스의 역사(‘18.3.26.)) 특혜는 한국옵티칼에도 마찬가지로 주어졌다.
“구미에서는 기업이 노조를 상대하는데 사측에 경찰과 구미시가 같이 붙어서 움직이는 느낌이에요. 우리가 처음 싸울 때 그랬죠. 지금 한국옵티칼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어요. 아사히는 진입로에 락카칠했다고 아스팔트 갈아엎고 손배소 제기하고. 천막농성장 고정하려고 팩을 하나 박았는데 거기가 회사 땅이라고 가처분 하고. 한국옵티칼은 고용 대책 마련하라니까 손배 가압류를 걸고. 자기들 책임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적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범법자로 만들려고 해요.” (진석)
“우리가 구미시청에 항의하러 갔을 때도 똑같았어요. 당연히 우리도 시청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를 막아서고 없는 사람처럼 대하더라고요. 공장에 불 난건 우리 책임이 아니고 우리는 고용을 보장하라고 하는 것뿐인데.” (정혜)
돌이켜보면 정혜 씨가 폐업한 공장에 남아 어려운 싸움을 시작한 이유도 억울함과 관련된다. 1, 2차 희망퇴직을 받을 때도 회사에 남았고, 물량 대비 인원이 감소한 시기 밤낮없이 불만 없이 회사를 살리려 일했다. 회사가 앓는 소리를 할 때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하며 회사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가 주최한 한 설명회에서 회사 측 설명을 듣고 정혜 씨는 분노했다. 희망퇴직 때 떠난 노동자는 회사가 어려울 때 나간 사람들이고, 남은 노동자들은 회사 생각도 안 하고 버텨 폐를 끼치는 사람처럼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때 제가 손들고 얘기했어요. 그럼 지금 남은 사람들이 잘못입니까. 그때 나갔어야 했느냐고. 지금까지 일한 걸 모욕하는 듯했어요. 믿었던 회사인데, 발등 찍힌 기분이었죠.” (정혜)
어려운 싸움이 분노로만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투쟁하는 순간에도 위안과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의 투쟁이 다른 곳곳의 투쟁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는 무거운 책임감마저도 느낀다. 노동자들은 그렇게 연결돼 모두가 떠난 공장을 지킨다.
“긴장되는 순간을 보내다가도, 저녁이 돼서 여기 연대하러 오신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가끔 위안을 느꼈어요. 연대, 동지. 그런 걸 느껴요.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것들이죠. 여기 오시는 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고, 어떤 투쟁을 하시는지도 하나하나 궁금해요. 차차 알아가면서 힘을 얻기도 해요. 그 마음으로 버틸 수 있고, 이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정혜)
“그전에는 연대란 걸 몰랐는데, 이제 연대의 힘이란 걸 느껴요. 어떻게 이렇게 자기 일처럼 와주시나 싶다가도, 이제 보면 예를 들어 외국 자본과 싸움이라든지 노조 탄압에 맞선 싸움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연결돼 있다는 걸 느껴요. 특히 만약에 우리가 투쟁에서 진다고 생각하면, 그게 또 다른 곳에까지 여파를 줄 거라고 생각해보면 더 그래요. 지금 투쟁이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에요.” (현석)
“제가 해고되고 1년쯤 됐을 때, 계속 의문이 있었어요. 우리 싸움에 연대하시는 분들을 보며 ‘도대체 왜, 뭐 때문에’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지나고 나니 조금 알겠어요. 주고받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또 중요한 건 같은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밖에서 이래라 저래라하긴 쉽거든요. 하지만 진짜는 현장에 있어야 감각할 수 있고, 함께 지혜를 모을 수 있어요.” (진석)
“아사히 투쟁 9년 동안 배운 걸 실천하는 거죠. 우리가 받은 걸 그대로 나누는 거예요. 옵티칼 투쟁이 아사히 투쟁과 연결돼요. 아사히 투쟁은 아직 진행 중이죠.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내용은 우리가 이긴 투쟁이라 생각해요. 이미 아사히는 죗값을 치르고 있거든요. 투쟁에 나선 우리 개인들이 감수해야 할 힘든 일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감당할 수 있어요. 조금 오래 싸운 우리 경험이 정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동지들이 얻을 것도 있을 거예요. 우리가 다 같이 잘 되는 길이 이기는 길이에요.” (수일)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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