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성별 대결이 은폐하는 것들

“원인 규명하지 않으면 여성혐오는 더 진화하고 발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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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경찰은 수사 시작 이틀만에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을 내렸고, 정부는 여성대상 강력범죄 예방한다며 CCTV 설치와 남녀공용화장실 분리를 대책으로 제시했다. 과연 조현병 또는 남녀공용화장실이 문제일까?

2일 오후 2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교육센터에서 ‘대구에서 여성혐오를 말한다’ 집담회를 열었다. 30여 명이 참여해 여성혐오 현상과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대구 모 대학교에서 이런 과제를 냈다고 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묻지마 살인 사건인지 여성혐오 살인 사건인지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경찰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와 관련 없다’고 결론 내렸다. 가해자가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았고, 최근 1년간 약을 끊어 증상이 심해졌다는 게 근거였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그의 말이 정신질환 때문에 나온 ‘헛소리’라는 거다.

“경찰 말대로 조현병 환자의 개인적인 행위라고 칩시다. 심리적, 정신적 건강이 사회구조와 무관할까요? 분명히 국가나 공교육에서 사적인 영역 가정이나 종교 등을 통해서 여성은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배워왔을 겁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은 거죠.”(강혜숙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가해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더라도 이 사건을 개인적인 일탈로 봉합하기는 어렵다. 씩씩하고 용감한(해야 한다고 길러진) 남성이 여리고 수줍어야 할(해야 한다고 길러졌을) 여성에게 무시당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욕적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무시한 수많은 이들의 공통점을 여성으로 꼽은 것은 그런 이유다. 무시당해서는 안 될 여성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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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 토요일 대구시 동성로 중앙로역 2번 출구에서 추모발언대가 열린다.

성별로 나눠지는 가해자와 피해자, 정말 그럴까?

가부장제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구분짓고, 남성에게 권력을 줬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받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남성이지만, 남자답지 못하면(여자 같으면) 그 또한 권력 집단에서 배제됐다.

“젠더 폭력이 여성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들에게도 젠더 폭력이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남자답지 못하게’, ‘여자같이’ 왜 그러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가 왜 그렇게 작냐, 왜 그렇게 소심하냐는 등. 결국 남성에게 가해지는 젠더 폭력이 여성혐오를 낳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 생각합니다.”(김재환(대구 추모 및 자유발언대 공동제안자))

가부장제가 만들어 낸 여성혐오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다운’ 사람으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여성혐오 행위자 역시 남성만이 아니다.

“사실 여성혐오를 남성들만 하는 건 아니에요. 많은 주민분께서 이 사건 이후에 여성인 자식들을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다니면 저렇게 죽는 거야 이런 식으로요. 분명 이것도 여성혐오예요. 이미 여성혐오는 굉장히 일반화된 현상인 거죠.”(장지은 북구여성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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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노골적인 여성혐오 현상, 갑자기 왜?

여성혐오는 최근 들어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 역사와 함께 해왔다. ‘가부장제 하에서의 여성 억압’ 등으로 불리던 것이 최근에서야 ‘여성혐오’라는 세련된(?) 새 이름을 만났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현상은 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를 외치며 IS로 떠난 김군을 시작해 일베, 강남역 살인 사건까지. 남은주 대구여성회 대표는 “이런 여성혐오 현상의 원인을 지금 규명하지 않으면 그 현상은 더 진화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남성들이 헬조선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고, 패자부활전이 없는 구조 속에서 엄청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분노가 사회구조로 이어지지 않고, 약한 여성에게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차우미 대구여성의전화 대표)

고용 불안, 청년 실업 등으로 불안한 미래에 대한 원인을 여성에게 돌린다는 지적이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남성들이 일자리를 잃기라도 한 걸까. 정말 당황스러운 발상이다.

“이전까지 ‘남성 가장 모델’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식이 깨진 거예요. 남성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을 여성이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번 사건을 보면 육체적 힘에 있어 여성을 약자로 인정하지만, 여성이라는 성별이 구조적으로 약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남성 일반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근저에는 이런 혐오를 조장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적 원인은 쏙 빠지고 성 대결로만 남는 거죠”(신박진영 대표)

결국, 최근 나타나는 극단적인 여성혐오 현상에 대한 원인이 분명해져야 한다. 가부장제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면 정말 환영할 일이고, 고용 불안 등 구조적 원인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그 구조로 화살을 돌려야 한다.

오는 4일 오후 9시, 중앙로역 2번 출구에서 ‘밤길을 되찾자’ 밤길 행진이 시작된다. 중앙로역 2번 출구에서 추모발언대를 마련했던 이들이 추모를 넘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대해 알리고자 마련했다.

“여성들이 이제는 이런 범죄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문제임을 직시하고 추모현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폭력을 견딜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과거에 노예들이나 했던 겁니다. 노예들도 혁명으로 판을 엎었습니다.”(강혜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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