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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이하석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기억의 미래>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꽃과 벌, 나비의 봄을 그린 1행시 ‘밝은 교신’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는 ‘가창댐’, ’구절초‘ 같은 시편들과 6장에 걸쳐 산딸나무와 후투티가 “서로 갖는 사랑의 의지와 욕망”을 노래한 ‘산딸나무 일기’ 등 총 61편의 시를 5부로 나눠 실었다.
하루에도 수백의 나비들 벌들 활주로 뜨고 내리느라
꽃의 관제탑은 쉴 틈이 없지만, 종일 밝게 펴놓은 교신들
로 오늘도 단 한 건의 항공사고가 없었다.
– ‘밝은 교신’ 전문
개는 가로등 불빛을 뒤집어썼다.
밤의 그림자를 세우듯.개는 어둠을 향해 으르렁댄다.
개는 기어이 쓰레기 분리수거장조차 뒤진다.
이 동네가 버린 어둠들이 그렇게 발각된다.나는 피투성이로 웅크린다.
나는 어둠에서도 드러나 찢어발겨지리라.숨어 있는 나를,
개는 비릿한 어둠인 양 노려본다.나는 개의 목줄이 이미 풀려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 ‘개’ 전문
이하석은 시인의 말에서 고백한다.
“전반부가 삶/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후반부는 구름의 주소록? 어쩌면 다 구름의 주소록?
나는 참 멀리 와서도 여전히 제자리에서 주소가 없느니.”
김문주 문학평론가(영남대 국문과 교수)는 해설 ‘응시의 풍경과 음지의 시학’에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원천이 되었던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기, 그 시기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 폭력의 역사를 형상화한 ‘천둥의 뿌리’ 그리고 이번 시집의 3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공동체의 얼굴, 그 주름의 역사, 그 음지에 겹쳐진 그 고통과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에 스며들어 시의 몸을 겹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시집 1, 2부는 시인의 발길이 닿은 장면을 그린 듯하다. 버려진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페트병’, 지금도 시인이 앉아 창밖을 보고 있을 것 같은 강변 카페 ‘블루 콤마’, 코로나 시절의 정서를 담은 ‘마스크’, ‘틈만 나면’ 같은 시편이 그렇다.
3부는 ‘가창댐’, ‘파문’, ‘호명1’과 ‘호명2’ 등 13편을 실었는데, 전체 시가 전작 <천둥의 뿌리>의 역사의식을 이은 듯하다. 이 가운데 김춘수의 ‘꽃’을 고친 ‘호명2’는 이름이 불리는 것이 시대 상황에 따라 사랑의 노래가 아닌, 아주 위험천만한 부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밀봉된, 물.
수문이 침묵 끝에 꺼내놓는 물의 편지가,
하류, 마른 가슴들의 저수지를 설레게 한다.그 수심水深을 다시 봉인하는
수면의 살엄음.
– ‘가창댐’ 전문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
시의 말로 약속 잡고
결국 더 시선을 건드리지.그런 음지陰地지. 사랑은
시간의 공간이어서
잔 이별마저 시로 돌아보는 거야.너는 내게 눈웃음 짓는다,
나무 의자 수리하는 시인같이.
그런 시는 도대체 무슨 눈길일까?퇴고할 수 없는, 그래,
나를 응시하는 너 말고 이 세상에
누가 더 낯선 시인가?
– ‘낯선, 시’ 전문
마지막 5부에는 ‘뒤늦은 처음’, ‘낯선, 시’, ‘시선의 기척’, ‘수니’와 6개의 소제를 가지고 쓴 장문의 시 ‘산딸나무 일기’ 등 6편을 실었다. 김문주 평론가는 <기억의 미래> 5부에 대해 “노년의 시인에게 찾아온 그윽한 발견과 환희의 정념이 풍경의 서사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지난달 18일 쎄라비 음악다방에서 열렸던 <기억의 미래> 북콘서트에서 이하석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 갖게 되는 감정 가운데 첫사랑의 감정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 사물이든 사람이든 대상에 대해서 가졌던 적대적 감정 이런 것들이, 물론 근본적으로는 그대로 유지가 되겠지만 그 기반을 이루는 기류는 사랑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하석 시인은 1948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경북대에서 사회학을 전공, 영남일보 기자로 일했다. 1987년 대구민족문학회 공동대표, 2016~2017년 대구문화예술회관 예술감독, 2018~2022년 대구문학관장을 맡았다. 1971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했고, 김수영문학상, 도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