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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지 9년 정도 지난 시점인데도, 권상일은 업무 담당 하급 관료의 위치에 있었다. 조정에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해야 부서에서 맡은 업무 정도였으며, 당시 영남의 중앙정계 진출이 막혀 있어서 특별한 정치적 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고향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도착했다. 편지를 보낸 사촌 형의 말에 따르면 조정의 명령으로 “임오년(1702년) 이후 창건한 모든 서원흔 훼철하라”는 관문關文(상급기관에서 하급기관에 내리는 공문서의 일종)이 경상도에 내려와 있었다고 했다. 깜짝 놀랄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점이 1719년이었으니, 1702년부터 1719년 사이에 설립된 서원 전체가 훼철 대상이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안동부에 관문을 베껴서 보냈고, 안동에서도 관내 서원들 가운데 훼철 대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내용이 권상일의 사촌 형이 관여하고 있는 이계서원伊溪書院으로 통보되었다고 했다. 이계서원 역시 1702년 이후에 설립된 서원이어서, 안동부사가 훼철을 단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던 터였다. 이렇게 되자 사촌 형이 급하게 그 연유를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관직에 있었던 권상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안이 급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권상일 역시 자기 업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정 내 담당 부서에서 확인해야 할 사안이기는 했다.
관문을 내려보낸 곳은 예조였다. 이튿날 권상일은 예조정랑 신일신申日新에게 어떻게 된 연유인지를 묻고, 예조에서 각 도에 보낸 관문 내용을 베껴달라 부탁했다. 다음날 신일신이 자세한 연유를 적은 편지와 예조에서 보낸 관문 내용을 보내왔다. 그제야 권상일은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작년에 경상도 어사로 내려갔던 이명언李明彦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해 경상도를 돌아본 후, 서원 신설 금령을 어긴 곳이 경상도 내에만 70군데가 넘는다면서 그 서원들 리스트를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렸던 터였다. 이를 받아본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왕의 앞에서 이를 보고했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서원 훼철령이 내려졌다.
알고보니 이계서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계서원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왔지만, 순흥順興에서는 단계서원丹溪書院도 훼철령이 내려진 듯했다. 이계서원에서 사촌 형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서원 훼철을 막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왔고, 순흥에서도 훼철을 거두어 달라는 연명 상소를 가지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다른 지역보다 주로 영남이 문제가 되었고, 당연히 영남에서의 반발 역시 컸다. 특히 지역의 서원은 단순한 학문 수양 공간을 넘어, 지역의 인물을 성현으로 배향하고 메모리얼 하는 신성한 공간인 탓에, 훼철에 대한 반발 역시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정 입장에서도 이번 조처는 즉흥적인 게 아니었다.
서원은 향교와 달리 도덕 실천을 목표로 하는 도덕 수양 공간이었다. 특히 이황은 서원을 설립할 때 배향하는 인물을 공자나 맹자처럼 멀리 있는 인물이 아니라, 지역에서 바로 따라 배울 수 있는 인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물론 유림의 공론 과정을 거처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성현으로 추대되어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지역 인물의 배향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 지역에서 학문적 성취와 실천을 했던 사람이면 누구나 성인으로 배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렇게 지역 지역마다 성현들이 넘치면서, 조선은 서원을 중심으로 완전하게 유학으로 침잠된 사회가 되었다.
이처럼 중국과 구분되는 조선 서원의 특징은 유학이라는 이념이 지역과 개개인까지 지배하는 최고의 이념 사회를 구현하게 했지만, 동시에 문제도 발생시켰다. 지역 인물 가운데 역사적 평가를 통해 서원에 배향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서원의 건립이 남발되기 시작했다. 특히 학문적 차이가 정치적 견해 차이를 만든 조선 사회에서, 자기 당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우위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서원을 경쟁적으로 건립했다. 그리고 배향된 인물에 대해 조정의 사액(조정에서 해당 서원을 공적으로 인정하여 서원 편액을 내려 주는 일)을 받기 위한 노력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당파 싸움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인조 때부터였지만, 숙종 때가 되면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붕당을 활용해서 자기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 했던 숙종으로 인해 영남과 기호의 대립은 극대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서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서원이 남설되는 만큼, 서원은 붕당을 가속화 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숙종 역시 즉위하자마자 이를 관리하려 했지만, 실제 숙종 대가 끝날 때쯤이면 정부가 공인하여 편액을 내려준 서원만 해도 130여 곳이 넘었고, 새롭게 창건된 서원만 해도 300여 곳이 넘었다. 연구에 따르면 대원군이 47곳의 서원을 남기고 모두 훼철할 때 한국에 대략 800~900여 곳의 서원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이때부터 얼마나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자, 1690년대 말이 되면 숙종 역시 원론적으로 서원을 장려하되, 남설은 막기 위한 고심에 들어갔다. 원칙은 문묘에 종사되었거나 큰 명현으로 인정받은 인물에 대해서만 서원 건립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정으로부터 허가받지 못한 서원은 훼철하고 이를 허용한 지방관을 문책하는 구체적인 안도 마련했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전국의 서원들을 조사하고 훼철하는 몇 단계 처분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 다시 경상도 지역 서원이 문제가 되었던 터였다.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70여 곳이 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고 하니, 조정으로서도 보통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예조판서 민진후가 강력한 서원철폐론자가 된 이유였다.
서원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이황의 입장에 따르면, 서원은 순수한 도학 수양의 공간이어야 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되고, 조정의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공간이 되어서도 안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학적 이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실천했던 선현들을 배향하고, 그러한 실천 유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서원 건립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래야 할 서원이 당파가 집권하는 정당성을 만들고, 붕당의 거점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서원이 가진 본래 의미와 기능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서원 훼철론이 강하게 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서원이 훼철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초심, 즉 서원을 세웠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