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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첫 시집『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는 지독한 상실과 가없는 방랑의 시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낙타의 꿈」은 가슴이 저리다. 오랫동안 정주(농경) 문화가 뿌리를 내린 한국에서 유목의 상징인 낙타는 낯설며, 우리 문학 작품 속에서 이 동물은 희소하게 등장한다. 소설로는 오로지 서영은의 제7회(1983) 이상문학상 수상작「먼 그대」가 있을 뿐이고, 주목할 시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라는 도입부로 시작하는 이 시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지만 일반적인 사랑의 시는 결코 아니다. 의인화(擬人化)된 낙타와 주인과의 관계를 애모로 치환하면 이해가 더 수월할 수 있겠지만, 그런 독법은 고급 포도주를 몇천 원짜리 탄산음료와 바꾸는 일이다.
이 시가 사랑의 시가 아니라는 것은 도입부에 이어진 낙타의 회상에 암시되어 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사랑은 서로 만나는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누가 누구를 데리러 오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다가 주인은 낙타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기도 전에 ‘혹’이라는 짐을 지고 태어난다. 낙타의 꿈은 그 짐을 벗는 일, 곧 해탈이다. 이런 뜻에서 이 시는 영적 스승과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태복음」4: 18~22) 이 시의 전개에는 “길”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길은 구도(求道)의 상관어다.
이 시를 직업적인 구도자와 그들의 팬덤(fandom)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배와 착취의 우화로 감상할 수도 있다. 팬덤의 행복과 생의 의미는 전적으로 구도자를 섬기는 일에 부수되어 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팬덤의 지극한 섬김 속에서 구도자가 어린아이가 되는 기적이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 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씻어주듯이, 낙타(팬덤)는 자신의 생명이나 같은 물로 어리광쟁이들의 얼굴을 씻어준다. 이런 전도 속에서 구도자는 무럭무럭 자란다. 몇몇은 해탈하지만 대부분은 ‘먹사’나 ‘땡중’이 된다.
슬픈 것은 먹사와 땡중에게 돈을 뜯기고 몸을 버려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 사기꾼들은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인간의 약점을 보여준다. 반면 사막을 바다로 바꾼 이는 홀로 바다를 건너간다.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부처 이후로 부처가 나온바 없고, 예수 이후로 예수가 나온바 없다. 낙타는 주인을 배웅할 수 있을 뿐 자신의 혹은 끝내 벗지 못한다. 시의 마지막 대목이다.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이문재 시인은 폭로나 야유와 거리가 먼 시인이다. 이 시는 미망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