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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와 방송 등 음성을 귀히 여겨야 하는 직업으로 살다 보니 목소리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된다. 더 중후한 음성으로 더 깊게 울리고 더 멀리 퍼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지만, 타고난 성대가 그리 좋지 못해서 늘 좌절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목이 아니라 배에 힘을 주고 말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물리적, 생리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비유적으로도 그렇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목소리가 더 진심을 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론은 목소리다. 민주주의가 ‘견해’와 ‘목소리’의 다양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때, 미디어 폭발의 시대에도 그것은 여전히 언론을 통해서 상당 부분 확보된다. 특히나 입을 갖고 있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존재와 집단의 소외는 여전하다. 이들을 대변하는 언론의 중요성은 이 ‘개인미디어 번성’ 환경에서 오히려 더 커졌다. 겉보기엔 누구나 마이크를 쥔 것 같지만, 다수 공중에게 도달할 수 있는 스피커는 비율적으로 더 소수에게 장악되고 있어서이다.
약자들 (곧 약자가 될 운명에 처한 한때의 강자들) 앞에선 그렇게나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언론은 사실 독자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배는 독자가 아닌 광고주가 채워준 식량으로 든든하다. 그러니 그들에겐 독자가 중요하지 않다. 기사라는 이름의 낚싯바늘에 꿰어 광고주에게 팔아넘길 독자들의 ‘눈알더미’가 귀중할 뿐이다. 그들이 그토록 자신 넘치는 이유는 같은 가치를 가진 평범한 독자들의 후원 덕분이 아니다. 공동의 이익으로 묶인 기득권을 뒷배 삼아 그들은 오늘도 떵떵거린다.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건 그 큰 목소리의 일부가 된 듯한 착각일 뿐이다.
권력 감시라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약자 지향적 지역 언론, 뉴스민. 기나긴 수식어만큼이나 지난함을 타고난 언론이다. 언론의 이상에 가까워질수록 생존이 어려워지는 아이러니. 얼마 전 동료 언론학자들과 펴낸 책 <언론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우리 민주주의의 비극이 고스란히 뉴스민의 오늘에 투영되어 있다. 압력에 고개 숙이지 않고 옳은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이들은 안다. 아무리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키우려한들, 도무지 힘을 낼 수 없는 허약한 배로는 역부족이란 사실을. 텅 빈 뱃속과 얇아질 대로 얇아진 뱃가죽으론, ‘진군을 위한 북소리’를 내기 위해 자신의 배라도 두들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몇 개월 전부터 나는 뉴스민의 소액 후원자, 좀 더 적극적인 우리말로 ‘벗바리’가 됐다. (어원적으로야 서로 다른 말이겠으나) 뉴스민의 ‘앞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광고주를 끌어다주진 못하더라도, 어디 가서 꿇리는 마음 없이 옳은 목소리 당당히 내라고 ‘뒷배’를 봐주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됐다. 내가 뉴스민의 작은 뒷배를 자처한 건, 이 지긋지긋한 저널리즘의 딜레마를 깨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내 학문이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하는 언론상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입증할 강한 책무를 느껴서이다. 나의 후원 동기는 내 학문의 부끄러움과 자존심에 있지만, 각자의 동기는 또 다를 것이다. 더 많은 벗바리들이 모여 뉴스민으로 하여금 더 깊고 더 너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길 간절히 기원한다.
정준희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