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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불평등’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닥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여파로 우리나라의 불평등 수준은 OECD 평균치를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소득불평등만 해도 OECD 36개국 중 30위권이다. 불평등은 실로 많은 모순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건강과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젠더나 정규직-비정규직, 학력, 출신 등 사회·문화적 위계와 연결되어 ‘불평등’을 강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직무성과급제를 포함한 노동개혁을 예고했다. 윤석열 정부는 근로시간제 유연화, 직무성과급제를 효과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노동조합을 강경하게 공격함으로써 노동자 내부의 분열을 기도했다. 노동개혁 시도에 순응적이지 않은 ‘조직된 노동자’(=노조)를 악마화해 불만을 외부화(분할 통치)하고,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는 방식을 꾀한 것이다. 전 세계적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한국 경제의 지표들이 확연하게 개선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재벌 자본에게 돌아가는 잉여가치 수준을 유지시키려면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임금을 통제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정책이 방치된다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보다 심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치나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조금씩 굴절되어 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야말로 객관적 시야로 세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양대 진영의 언론과 정치의 시야 역시 지배적인 시선과 멀지 않다. 그러니 우리 역시 객관성이라는 잘못된 신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회 모순을 인식하고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조나 시민단체, 언론 등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마다 ‘턱’하고 막히는 문제가 바로 대중과 연결되는 ‘창’이다. 시민단체나 노조가 차린 가판은 언제나 초라해 보이고, 도심 집회는 경찰 버스에 의해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사회 모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주 부자유와 억압을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이나 노동 문제를 바라보는 많은 관점은 다분히 서울 중심적이다. 주류언론과 기성정치는 하나같이 서울로 시야를 정박시킨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주류언론이 원경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여기지만, 불가피하게 주류언론은 ① 서울에 사는, ② 돈과 권력 있는 이들의, ③ 지독하고 오래된 편견이 훨씬 지배적이다.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던 많은 문제들의 타래가 ‘지역’에서 엉켜있다는 것을 느낀다. 가령 양극화나 소득불평등, 기후위기, 환경파괴 등 모순의 최전선은 ‘지역’에 있다. 민중이 대면해 살아가는 기득권은 ‘지역’에서 가장 파렴치한 모습으로 돈과 권력을 휘두른다.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구체적 현실이 바로 ‘지역’에 있다. 아무리 거창한 말로 세상이 잘못됐다고 떠든다고 한들 자세히 살펴보고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모순’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대구·경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데 뉴스민을 보면 단지 대구·경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느낀다. 노동 문제를 둘러싼 뉴스민의 시선에는 노동시간, 인원 감축, 이주노동자 단속추방, 산업재해, 건설산업 재하도급, 파업, 성차별 등 노동 문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뉴스민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창이다.
올해 노동절에는 루쉰이 했던 “절망에 반항하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다. 1886년 5월 1일 “임금 삭감 없는 8시간 노동”을 내건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 이래, 노동자·민중, 평범한 사람이 자신들이 처해있는 계급적 현실에 대해 외치고 변화시켜 온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울과 절망, 비관을 말하는 시대에도, 권력자의 ‘분할 통치’에 맞선 저항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그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상호참조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구경북 독립언론 뉴스민은 “절망에 반항”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창구다. ‘사유의 유격전’을 펼칠 근거지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