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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 기자였던 25년 전부터 신참 언론학 교수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꼭 붙잡고 있는 질문이 있다. ‘좋은 기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이것은 아주 작은 질문이다. 좋은 세상, 좋은 나라, 좋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묻는 이들에게 ‘좋은 기사’ 따위는 너무 작아서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깟 기사 하나로 무엇을 어쩌겠는가 말이다.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의 질문은 이렇게 사소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이곳은 깊고 넓은 분지다. 사방을 둘러싼 산이 높아 공기 흐름조차 변하지 않는다. 분지의 바닥에 착 가라앉은 누구도 꿈쩍 않을 것이라고, 여기선 아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린 시절의 나는 생각했다. 그 시절 품었던 질문은 거대했다. 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이념, 다른 정치를 궁금하게 여겼다.
기자 노릇을 한참 치른 뒤에야 알게 됐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보수나 진보와 같은 이념적 지향이 아니었다. 삶의 경로와 세상의 방향을 설명하는 이치가 오직 하나이고, 그것에서 벗어난 무엇도 수용하지 않는 집단, 조직, 사회, 나라에서 사람들은 질식해갔다. 오늘날 대구·경북의 가장 큰 특징 및 문제도 보수성이 아니라 ‘일원성’ 또는 ‘단일성’에 있다. 하나의 원리로 일상부터 정치까지 규율하면서 이를 되레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와 제도가 사람들을 대구 분지 바닥에 엎드려뻗치게 한다.
그 처방은 물론 다원성 또는 다양성이다. 그런데 다원성·다양성을 그저 대립항의 공존으로 여기면 안 된다. 보수적인 대구에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거나, 국민의힘 시장 말고 민주당 시장이 등장해야 한다는 진단은 반쪽짜리다. 대구를 지배하는 일원성 또는 단일성은 서로 대립하는 집단에서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등장하고, 미시적 개인부터 거시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프랙탈 구조처럼 반복된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층적 다양성’이다. 그 지혜를 나는 ‘좋은 기사’에 대한 질문에서 찾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좋은 기사는 무엇인지’ 젊은 독자에게 묻고 그 특성을 귀납적으로 추출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결과를 내놓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나로서는 놀라운 발견을 이미 이뤘다. 좋은 기사를 분간하는 독자의 여러 잣대가 있지만, 결국엔 다양성 또는 다원성의 문제였다. 독자는 한 사람만 취재한 기사를 싫어했다. 찬반양론을 취재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중요한 사안이니 반드시 알려주겠다는 식의 ‘단일하고 일원적인 기사’를 독자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여러 사람, 더 많은 사람을 취재한 기사를 좋아했다. 여러 곳을 다니고, 여러 문서와 자료를 분석한 기사를 좋아했다. 취재 방법이나 기사 작법뿐만 아니라, 주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자는 일상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 기사를 좋아했다. 일상에서 출발하여 제도에 이르되, 다양한 사실을 전하면서 다양한 가치와 관점을 알려주는 기사라면, 더더욱 좋아했다. 그런 기사를 보도하는 곳이 보수 언론인지 진보 언론인지, 신문인지 방송인지 유튜브인지는 (특히 젊은) 독자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기사를 구성하는 내용과 형식의 모든 요소와 측면에서 다양성을 풍부하게 갖춘 기사를 독자는 최고로 여겼다.
해외 언론학자들의 다른 연구를 보니, 다른 나라 독자들도 비슷했다. 어느 해외 언론학자는 이를 ‘다성성(multivocality, 多聲性)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정보와 의견과 인간 유형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하나의 정보, 하나의 취재원, 하나의 관점을 전하는 기사를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뉴스민>이 살아남고, 부흥하고, 번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 언론이 대구에 필요하다면, 서울에 근거한 진보 언론이 일부나마 그 구실을 대체할 수 있다. 권력 감시가 부족하다면 지역에 있는 기성 언론을 각성시키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보수 일변의 대구 정치를 바꾸고 싶다면, 대안 언론에 대한 기대를 접고 그냥 정당 활동에 주력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저것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대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거의 유일한 대안은 <뉴스민>이다.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닮은 꼴처럼 발생하고, 가족부터 학교와 직장까지 반복되는 ‘일원성의 폭력’을 혁파하려면,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아니라) 일상부터 정치까지 좌와 우를 넘나들며 수시로 다양하게 들춰보는 언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뉴스민>은 정당이나 기업과 관련한 이해관계가 없고, 거대 이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기존의 출입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관급 보도자료 베껴 쓰기를 수치로 여기며, 오직 ‘좋은 기사’를 쓰고 싶은 젊은 사람들이 만드는 언론이다. 따라서, 기업과 노조를 동시에 고발하고, 시장과 시민단체를 함께 감시하며, 글로 기사 쓰면서 영상도 만들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면서 일상적 이슈도 다룰 수 있다. 이것은 대형, 유력, 기성 언론이 전혀 못 하는 일이다.
다만 ‘좋은 기사’에도 규모와 수준의 문제가 있다. 하루 한 번 좋은 기사 쓰는 것으로 부족하다. 하루 서너 번 보도해야 한다. 서너 명의 취재원을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열 명을 만나 취재해야 한다. 열 명의 좋은 기자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백 명의 좋은 기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이제 천 명, 만 명의 후원자가 필요한 것이다.
어린 시절, 대구 분지 바닥에 눌어붙은 끈끈한 공기가 답답해지면, 나는 앞산에 갔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좋은 곳이었다. 앞산에 오르면 다른 많은 산과 여러 길이 보였다. 분지 바닥에선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산에서 인생과 세상의 앞을 보았다. 좋은 세상, 좋은 나라, 좋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묻는 이들에게 ‘좋은 기사’로 앞을 보여주는 일을 <뉴스민>이 잘 치러내면 좋겠다. 하나 또는 둘로 압축하지 말고, 다양하여 흥미진진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더 자주, 오랫동안, 잘 볼 수 있도록 앞산만큼만 버텨주면 좋겠다.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