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연대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한 종합영화인의 궤적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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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한 <사랑의 고고학>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주인공 ‘소영’의 예전 남자친구로 출연한 김용삼 감독이었다. 장기 연애를 치른 주인공 남녀를 제외하면 준 주연에 가까운 비중이다. 2010년부터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며 활동 중인 대구경북지역의 몇 안 되는 창작자이자 준수한 연기력까지 겸비해 우정출연 수준은 예전에 뛰어넘은 연기자이기도 하다. 1편의 장편과 7편의 단편영화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김용삼 감독의 작품목록이다. 수상 실적이나 지역 밖에서의 주목도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남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고유한 결을 갖고 있고, 그 특징 때문에 전반적인 독립예술영화 유행과는 동떨어진 작품세계를 고수하는 중이다. 그 독자적인 경향성 덕분에 어떨 때는 주목받고, 다른 때는 외면당하는 식으로 부침을 겪곤 한다. 자유분방한 것 같으면서도 감독의 이름 세 글자를 각인시키는 특유의 색깔이 역력한 김용삼 감독의 영화들은 개별 작품을 넘어 작가 자체로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 1기: <가족오락관>에서 <소멸불가>에 이르는 초창기 작업들

지역 대학교에서 영상 관련 전공을 수료한 감독은 승부를 내야 할 4학년 졸업 시즌에 일련의 셀프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혼합된 작업들로 1차 주목을 받게 된다. 중반 이후로는 보다 전통적인 드라마 서사에 가까워지지만,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자기반영적 요소 도입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리얼리티는 이후로 쭉 감독의 영화세계를 각인시키는 인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전 작업으로 2010년에 완성한 <나프탈렌이 되어줄래?>가 있지만 감독이 현재 공개를 않는 중이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가족오락관>

지역에서 부모 세대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하지 못한 청년의 삶이란, 그리고 지역에서 영화감독이 되려는 청년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김용삼 감독의 이름을 처음 알린 <가족오락관> 은 그 2개의 초상을 한데 모아 담아내려는 시도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여름 비좁은 집에서 선풍기에 의지해 속옷만 걸친 청년이 그야말로 ‘널부러져 있다.’ 그의 행태는 장기하의 노래 속 자취방 구질구질 라이프를 형상화한 것만 같다.

▲김용삼 감독의 <가족오락관> 스틸 이미지

하지만 확연히 두 가지 차이가 존재한다. 첫 번째. 청년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더 흔히 겪었긴 하지만 외부에선 쉽게 입에 담거나 옮기지는 않았던 익숙한 풍경이 그려진다. 대개 옛날 주택은 욕실을 겸한 화장실이 1개뿐이었다. 그래서 출근과 등교로 가장 분주한 아침시간에는 화장실 병목 현상이 벌어지는 바람에 누군가는 볼일을 보고, 다른 식구는 씻고 양치하며 투덜거리는 그림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가족오락관>에서 바로 그런 풍경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설마 하다가 화들짝 충격을 받을 이들이 제법 있을 테다.

뒤를 이어 다 큰 자식이 집구석에 죽치고 있는 꼴 보기 못마땅한 부모의 구박과 역성이 등장한다. 반박하거나 부정하기도 힘드니 그저 버티기 작전을 펼치는 청년의 시간이 계속된다. 살짝 뻔뻔하거나 종종 싫은 티를 내곤 하지만 정면승부는 불리한지라 치고 빠지는 일상의 소규모 ‘가家투鬪’가 추억의 타임캡슐처럼 묘사된다.

이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경상도 부모와 외동아들, 그리고 애완견으로 구성된 현실가족 이야기다. 주인공은 촬영시기가 여름이라 그런지 늘 속옷만 걸치고 뒹굴다 수시로 등짝 스매싱을 당하곤 한다. 어른들이 주말 일정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 청년은 자유를 만끽하며 소심한 일탈을 즐긴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불판에 고기를 굽고 마당에서 일광욕을 한다. 그리고 개에게 자신이 당한 설움을 마치 상황극을 벌이듯 재연한다. 반려동물이란 개념이 확립되기 전 집집마다 키우던 목줄 묶인 개의 팔자 그대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가족의 일상. 찰진 대화와 여전한 투정, 돌아오는 구박.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간다. 우리가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 한국의 현대 가족 풍경이 온전히 재현된다.

두 번째. 작품의 거의 모든 걸 혼자 담당한 감독이 주연임은 물론, 실제 가족이 출연진 전부라는 점이다. 그 지점에서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 적 속성에 밀접하게 걸쳐 있는 셈이다. 그렇게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선을 오간다. (국내가 유독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구분이 엄격한 편인데 외국이라면 재연 다큐멘터리로 분류되어도 될 정도다) 감독이 가족에게 사실적 연기를 ‘주문하기’보단 ‘평소대로’ 해주기를 요구하는 촬영 현장이 상상되는 부분이다. 그를 통해 획득한 ‘리얼리티’는 상당한 경지다.

<가족오락관>은 영화 전문 교육기관이 수도권에 비해 부족한 상황, 영상 워크숍 수준의 환경에서 남들 다 쓰는 고급 사양 장비와 전문 연기자를 쓰기 힘든 조건을 정확히 인지하고 제약에서 ‘탈주’해버리는 방식에 과감히 도전한 결실이다. 투박해 보이지만 사적 경향과 사회적 담론의 상호교차를 도모하는 것은 물론, 장르 형식의 실험을 펼치면서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사자후 격이다. 그렇게 감독은 이후 10년 넘게 변방에서 주눅 들지 않고 유행을 따르기보단 자기중심을 잡고 우직하게 정진하는 중이다.

<졸업과제>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두 번째 작업은 <가족오락관>과 연작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골격으로 졸업과제 제출까지 56일을 앞둔 감독 본인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생각해보면 수험생 시절엔 참 시간을 쪼개가며 알뜰히 놀았었다.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던 책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시험 직전 벼락치기할 때 다가온 금단의 유혹들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감독은 입사면접 복장차림으로 (전작을 본 이들이라면 익숙한) 옥상에서 가상 인터뷰에 응한다.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불안’처럼 감독의 졸업과제 진도는 지지부진하다. 불안을 떨치려던 시도는 그를 더 권태롭게 하거나 상황을 악화시킨다. 도피성으로 선택한 연애 또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김용삼 감독의 <졸업과제> 스틸 이미지

점점 구석으로 몰리던 감독은 막판에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는 식으로 오 헨리의 단편소설 같은 극적 반전을 맞이한다. 자신의 전작 <가족오락관>이 본인의 생일 전날 영화제에 진출하고 축하받으며 술에 쩐 채 얼떨떨하지만, 행복한 결말이다. 영화는 특별한 장치나 소품 없이도 마네킹, 콜라주, 컬러와 흑백의 화면 전환 등 요소들을 활용해 빤한 장소를 판타지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1997년 영화 <덴버>에서 앤디 가르시아가 자신의 죽음을 예비해 고별사를 녹음하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 마무리를 장식한다. 이십대 중후반 졸업준비 중인 한국남성 평균치의 풍경이 질척질척 세밀하게 묘사되고, 감독 본인의 속물성에 대한 자학 혹은 회한의 반성이 위악적이지 않게 보태진다. <가족오락관> 의 외전 혹은 후속편이라 할 이야기는, 전작에 이어 장르 교합과 구차하지만 현실적인 일상성의 조화로 인상을 남긴다.

<소멸불가>

전작들에서 자전적 경험담을 형식 실험과 조합한 이야기들을 선보인 감독은 <졸업과제>의 마무리에서 가벼운 터치로 접근했던 사후세계와 내세에 대한 주제에 천착한 신작을 선보인다. 전작에서 연결되는 주제에다 (감독의 중반 이후 작품들에서 주요한 소재로 다루게 될) 사랑이란 감정의 유효기간과 잔상이 추가된다. 죽음으로 한번 소멸하면 새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염세적 세계관을 프롤로그에 깔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김용삼 감독의 <소멸불가> 스틸 이미지

한 남자가 자살을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지 번번이 실패한다. “컷!” 소리가 난다. 다시 보니 화면은 학생단편영화 촬영 현장이다. 남자 역을 맡은 배우는 촬영이 늘어지는 걸 푸념하며 연신 기침을 해댄다. 그는 내일 ‘수진’을 만나기로 했었다. 다시 배경이 바뀐다. 모니터에는 두 번째 국면 설정이 떠 있다. 이것도 시나리오 속 이야기인 듯하다. 남자는 아내 ‘수진’의 출산이 임박했는데도 아직 원고를 끝내지 못한 상태다. 그 또한 기침을 시작한다. 순간 첫 번째 국면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남자가 약을 삼켰다 토하는 장면이 겹친다. 다시 첫 번째 국면의 후속장면. 마침내 목을 맨 남자는 마지막에 살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수진’의 환상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최종 국면. 명찰에 ‘수진’이 붙은 소녀가 실험실에서 방부 처리된 태아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실험성이 한층 짙어진 <소멸불가>는 전작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감독은 이후 4년간 영화작업을 떠난다. 본 작품을 만든 동기나 뒷사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다소간의 개인적 체험과 영화적 고민이 이후 후속작과 연속성을 가진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허무와 사변성이 숲속 축축한 공기처럼 자욱한 작업이다.

■ 2기: <혜영>이라는 사랑의 감옥 혹은 소우주

감독은 대학 졸업 후 4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섯 번째 작품 <혜영>을 세상에 선보인다. (한동안 감독은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울산에서 용접 기능공으로 일했다고 전한다) 오랜만에 완성한 영화는 말 그대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돌이킬 수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하지만 희미해지기엔 너무나 강렬한 그림자 같은 사랑이 짙은 안개처럼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다. 아마 감독의 작업들 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많은 이들이 접했을, 현재까지는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대표작이자 감독의 인장이 집대성된 작업이라 하겠다.

<혜영>

◆ 3장으로 구성된 슬픈 사랑의 연대기

영화가 시작되면 CG로 얼굴 식별을 힘들게 한 여자의 영상이 2분 가까이 음악과 함께 흐른다. 제목인 <혜영>과 그녀가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는 사이, 1장의 제목이 화면에 펼쳐진다. “혜영, 성우”. 전체 러닝타임의 6할을 차지하는 1장은 감독 본인이 맡은 ‘성우’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혜영’ 사이의 이야기다. 혜영은 ‘얀데레’ 캐릭터로 보일 만큼 성우를 구타하고 학대하기를 반복한다.

▲김용삼 감독의 <혜영> 스틸 이미지

전반부는 그런 혜영의 맹활약과 함께, 이를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능청스레 받아내는 성우의 슬랩스틱 코미디 기조로 흘러간다. 그리고 조금씩 둘의 관계에서 디테일한 측면들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혜영은 성우를 막 대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늘 염려하고 있다. 성우는 감정이 예민하고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어 보이는 혜영을 감싸고자 노력하는 캐릭터로 보인다. 물론 상호간 불협화음이 지나치게 팽팽해질 때는 서로 회피해 더 이상의 악화를 피하기도 한다. 성우는 마음을 정리한다며 홀로 노래방에서 절규에 가까운 열창 중이다. 둘만의 짧은 휴가가 끝나고 혜영은 작별인사와 함께 떠난다.

이제 2장과 3장이 남은 1/3 분량을 반절씩 차지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2장은 “성우”라는 부제를 갖는다. 혜영이 부재한 가운데 성우는 초췌한 몰골로 장발을 한 채 술에 절어 있다. 혜영과 그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고야 만 것이다. 다시 찾은 노래방에서 성우는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절창한다. 어느 날 성우는 혜영이 같이 여행가길 권하며 그려줬던 규슈 구마모토성을 혼자 여행하고 돌아온다.

3장은 “찬다나, 성우”의 이야기다. 1장에서 언급되었던 성우의 공장 동료,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찬다나가 혜영이 있던 자리에 있다. (물론 <혜영>은 퀴어물 기조와는 거리가 멀다) 성우는 혜영의 빈자리가 허전해 견딜 수 없어 보인다. 찬다나는 성우와 함께 치킨을 먹고 내키지 않는 야구중계를 보다 휴지를 챙겨서 사라지곤 한다. 여전히 성우는 혜영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한 채다.

◆ 상처와 기억은 오래 지속된다는 영화적 증명

아마 영화 도입부의 스크래치 효과가 잔뜩 들어간 동영상 속 여자는 실제의 혜영일 테다. 감독과는 어느 시간 동안 모종의 관계로 인연을 가졌을 것이 예상된다. 영화 속 사랑의 표현은 대부분 오붓하게 그려지기보단 치열하고 격렬한 시간의 기억으로 재연된다. 그리고 의도치 않은 이별과 상실의 시간이 닥친 뒤, 성우-감독은 그 시간을 힘겹게, 혹은 공허하게 현재진행형으로 겪는 중이라는 걸 관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프로야구나 웹툰, 힙합 등 실제로 감독과 혜영이 함께 공유했음직한 장치들이 영화 곳곳에 재현되며 기억 저장 장치처럼 활용된다.

저예산을 극복할 겸 시간적 배경을 과거로 설정하고자 감독은 적외선 흑백화면을 활용한다. 그렇게 구현된 단조로운 실내극이 작품 속의 세계와 잘 어우러진다. 독립영화에서 때로는 강박적일 정도로 삽입하려 시도하는 사회적 문제 제기도, 지역 독립영화에 묻어나는 ‘로컬리티’도 본 작품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어떻게 영화적 체험으로 관객에게 전달할까에 대한 집념만이 결정체로 남은 형태다. 인류 보편의 감정이지만 그 호흡은 지극히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란 요소에 대해 영화는 섬세함의 첨단을 달린다. 심지어 그것도 홀로 남겨진 자의 사랑 이야기다.

<혜영, 혜영씨>

◆ 단편 <혜영> 궁극의 확장판이 펼쳐지다

“김용삼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현재까지 대표하는 작품 <혜영>이 주목을 받으며 감독은 다시 영화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혜영>의 이야기를 보다 확장하는데 도전한다. 전작 또한 단편으로는 짧지 않은 40분의 분량이지만 장편이 된 <혜영, 혜영씨>는 그 3배가 넘는 분량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독립영화에서 단편으로 시작해 장편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적지 않지만 본 작품의 방법론은 퍽 극단적인 사례다.

초반부는 단편 버전의 <혜영>이 거의 그대로 들어간다. 전작을 봤던 이들이라면 시작부터 당황스런 전개다. 익숙한 장면들이 전작의 챕터 구분 그대로 진행된다. 1장 “혜영, 성우”, 2장 “성우”, 3장 “찬다나, 성우”까지는 제목 가운데 “혜영” 파트에 속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4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혜영씨”가 시작되는 셈이다. 감독은 단편에서 소개되지 않았던 혜영과 성우의 과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김용삼 감독의 <혜영> 스틸 이미지

4장 “혜영씨, 성우씨”는 이 특이한 커플의 만남과 진행경과를 해설하는 파트다. 서로 물과 기름 같아 보이던 두 남녀가 어떻게 맺어지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은 꽤 코믹스럽다. 하지만 이후 드러나는 상황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격렬함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현실 연애 풍경을 떠올릴 테고, 다른 누군가는 단편에서 이미 봤던 혜영과 성우의 티격태격 수준을 초월하는 기이한 관계의 기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미술을 전공해 자신의 자화상을 침대맡에 걸어두던 혜영과, 영화감독의 꿈을 가진 성우는 싸우고 화해하며 비 온 뒤 땅 굳듯 관계를 이어간다.

5장 “혜영씨, 성우오빠”와 6장 “혜영, 성우”는 그런 과정의 요약모음집이다.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인 둘만의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 마침내 혜영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둘만의 요새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성우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다. 뭔가 사연 많아 보이던 혜영의 비밀들은 6.5장 “성준, 성우”를 통해 보다 상세한 정보를 공개한다. 그리고 대망의 에필로그. 결말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전작 <혜영>의 프롤로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다시 단편의 엔딩을 변주하며 흘러내린다.

◆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결정판, 하지만 아쉬운 평가

<혜영, 혜영씨>는 구조적으로 단편에 이야기 살을 붙인 장편이다. 전작의 ‘프리퀼’ 형태도 드문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혜영과 성우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투입된 성우의 전 여자 친구 혜성과 혜영의 친오빠 성준 외에는 여전히 단출한 등장인물과 구성을 취한다. 여전히 영화 속 거의 모든 배경은 둘만의 우주라 할 이들의 원룸에 한정된다. 화면 또한 흑백을 거의 고스란히 고수한다. 그런 연속성을 통해 감독은 어떤 사랑의 잃어버린 연대기를 집요하게 그려내려 한다. 전작에 대해서도 언급했듯이 감독은 상실에 대한 잊히지 않는 회한과, 지우려 하면 더 선명해지지만 막상 기억하려 들면 희미해지고 마는 잔상을 영화 속 프레임 이미지로 보존하려는 욕망에 가득 차 있다.

또한 현실적인 청년세대 커플의 고충, 꿈과 사랑만 먹고 살 수 없는 실존의 문제가 영화 내내 혜영의 침대 머리맡에 걸린 자화상과 성우가 늘 걸치던 DIRECTOR 점퍼의 운명으로 상징화된다. 해당되는 부분은 장편의 호흡에서 매듭을 짓는 결착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태경과 고유준, 독립영화계에서 제몫 다하는 든든한 연기자들이 추가로 영화에 합류했지만 여전히 이 영화는 혜영과 성우의 이야기이다.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성우 역 김용삼 감독이 필사적으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그 몽환 속 주인공 혜영(혜영씨)를 형상화하려는 절절한 노력의 결실이다. 그 장대한 소우주는 독립영화란 대상이 사회적 코드나 이전 세대 거장들의 스타일을 찾아내야만 논평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당혹스런 충격으로 다가설 법하다.

하지만 인류 보편의 원초적 이야기인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초지일관,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은 참 드문 시도다. 에필로그에서 반복되는 3장 마지막 장면은 단 한 컷을 변주한다. 그 장면은 영원히 혜영(혜영씨)와의 시공간에서 빠져나오길 거부하는 성우의 ‘백일몽 왕국’으로 남게 될 테다. 그 ‘Daydream Nation’은 영화를 끝까지 본 이들에게도 ‘비밀의 화원’처럼 간직될 테다. 하지만 단편에 외피를 덧씌운 것 같은 본 작품의 구성에 당혹감이 컸거나 답습에 그쳤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단편에 비해 장편 버전의 <혜영>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채로 머물러 있다.

■ 3기: 끝나지 않는 대항해시대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감독은 이후 <혜영>의 변주로 여겨지는 2편의 단편을 선보였지만 자신의 대표작을 넘어서는 평가를 획득하지는 못한 상태다. 이후 선보였던 단편들은 감독 본인의 강렬한 창작욕구보다는 주변 동료들과의 공동작업에 가까워 보이는 측면도 있다. 2022년에는 유튜브에 쇼츠 영상을 올리는 <소오오름> 채널을 개설해 몇 편의 초 단편을 공개하기도 했지만 이후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건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가 부활을 선포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윤성>

현재까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한 공동 연출작인 <윤성>이 <혜영, 혜영씨>의 초벌 완성 이후 공개된다. (두 공동감독의 관계나 제작 과정에 대해선 따로 알지는 못한다) 본 작품은 <혜영>과 비교되는 전개 구조와 분위기를 띈다. 실제 인물과 배우가 겹치는 설정 –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자주 구사되는) 적외선 흑백 필터 사용 – 실내극 수준으로 간소한 극중 배경 또한 <혜영>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이다. 그만큼 남-여 ⇒ 남-남 구도로 바뀐 수준의 근접성을 보인다.

▲김용삼 감독의 <윤성> 스틸 이미지

후배 성우는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해 선배 윤성의 집을 찾는다. 성우는 선배의 집임에도 짓궂은 장난기를 선보이고 윤성 또한 곤란해 하며 되받아친다. 둘이 정말 친하거나 성우가 좀 성격파탄이거나 윤성이 엄청난 대인배 캐릭터거나 중에 하나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초반부는 1장 ‘성우의 방문’에 속한다. 하루 동안의 소동극 이후 둘은 각자 잠을 청한다. 성우는 밤새 방을 긁는 소리가 난다며 넌더리를 내지만, 윤성은 (1장의 상황을 반격하듯) 대수롭잖게 받아넘긴다.

이제 2장 ‘귀신 소리’ 파트다. 1장과 2장이 약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하고 이후 분량은 3장 ‘대구타워는 남산타워와 똑같지 않다’가 차지한다. 윤성은 성우에게 아는 여자후배를 소개시켜준다. 둘은 어색해 하지만 윤성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사이에 잘만 어울린다. (그러나 윤성은 구체적으로 뭐가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그들이 함께 먹는 음식의 변화와 함께 짧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그리고 파국의 서막이 시작된다.

영화는 전반에서 후반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초반부의 윤성과 성우에 대한 관객의 시각이 반전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부분은 사실 도입부부터 여러모로 암시되긴 했지만 쉽게 포착하기 어렵다. 둘은 떡볶이는 함께 즐길 수 있지만 햄버거는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성우가 별종으로 보이지만 점점 윤성의 고립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강하게 드러난다. 겉으로는 예의바르고 무리 없는 윤성은 실은 타인과 교감하거나 감정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 모든 게 자기 본위인 유형이다. 성우가 후반부에서 격하게 화를 내면서부터 둘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고 서로가의 벽은 끝내 허물지 못한다.

장르 실험과 함께, 사회적 주제보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집중하는 특유의 스타일이 아주 선명하게 각인된 작품이다. 다만 그런 스타일을 <혜영>에서 이미 접했던 이들, 특히 단편 영화가 세상에 소개되는 주요 통로인 영화제 심사기준에서 선호되기 힘든 반복적 패턴 때문에 요즘 영화제 취향과는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경향이 뚜렷해 보인다.

<재경>

이야기는 재경이 혼자 사는 아파트에 후배 성우가 갑자기 집을 구할 때까지 1주일만 살겠다며 들어오는 데에서 출발한다. 객식구인 성우는 3주가 지났는데도 통 나갈 생각을 않는다. 성우가 빈 집에서 자기 집 마냥 샤워중인데 처음 보는 여자가 불쑥 문을 연다. 알고 보니 재경의 동생 지원이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다투고 오빠의 집에 의탁하러 온 것이다. 이제 셋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재경> 역시 감독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른다. 그 스타일은 어떨 때는 신선함과 독창성으로 작은 주목 및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유행 사조와 겉돌 때에는 철저히 외면당하기도 해왔다. 그럼에도 감독은 시류에 맞춰 자신의 연출 방식을 변형시키기보단 고집스럽게 여겨질 만큼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해 왔다. <재경> 역시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감독 본인이 아니라 출연배우의 경험을 중심에 놓은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그런 특성 때문에 관객은 제3자의 입장에서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소화할지, 아니면 가능한 선에서 배경이 된 실제 상황을 파악할 것인지에 따라 본 작품의 수용법이 차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경> 역시 <혜영>이 가진 핵심요소들을 공유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개를 적시듯 스며드는 상실의 슬픔, 기억의 잔상처럼 남아있는 타인의 존재, 극도로 간소화된 시공간으로 구현된 배경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여 구축한 이미지는, 주인공 마음속의 슬픔과 공허를 형상화한 것처럼 여겨지는 아파트 층계의 기하학적 구조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미지이지만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잘 활용되어 (영화의 영문제목처럼) 제대로 된 미궁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새로운 단계를 기다리며

<혜영> 이후로 감독의 신작들은 동어반복이 아니냐는 혐의를 일정 부분 뒤집어쓴 채 정체상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혜영>의 장편 버전 <혜영, 혜영씨>나 이후 쉬어가는 것처럼 선보이는 일련의 작업들 또한 “김용삼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원심력 안에 위치하되, 변주되는 지점이 조금씩 관측되는데도 조명되거나 선택될 기회와는 멀어지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자신의 영화를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들, 우리 주변에 숨어 있을법한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착목과 상처를 속으로 삭이며 버티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김용삼 감독의 영화에는 시치미 뚝 떼고 가득 감춰져 있다. 섬세한 감정 선이 툭 끊어지듯 분출하는 순간에 누군가는 자신의 슬픔에 대한 위로를, 다른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쳐버린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게 될 테다. 그 표현이 종종 극점을 향할 순간이 되면, 슬픈 사랑의 슬픔의 바닥없는 깊이를 체감할 수 있다. 지역에서 찾기 힘든 일관된 작품세계를 고수하는 이 독자적인 작가가 펼쳐 보일 다음 단계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바이다.

<작품정보>

나프탈렌이 되어줄래? Would you be the Naphthalene?
2010|한국|드라마|18분
감독 김용삼
2010 11회 대구단편영화제

가족오락관 Home Entertainment
2010|한국|코미디/다큐-드라마/가족|23분
감독/주연/제작/각본/촬영/음악/편집 김용삼
출연 김용삼(김성우), 이정자(어머니), 김동규(아버지), 맥스(개)
2011 12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대상
2011 10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졸업과제 To Max & Locke
2011|한국|다큐-드라마/판타지|23분
감독/주연/각본/촬영/편집 김용삼
출연 김용삼, 맥스, 로크
2012 13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대상, 관객상

소멸불가 IMMERSION SPECIMEN
2012|한국|드라마/극중극|13분
감독 김용삼
주연 노승탁
출연 정윤지, 김용삼
2013 18회 인디포럼

혜영 Hye-Young
2017|한국|멜로|40분
감독 김용삼
출연 문혜인(혜영 역), 김용삼(성우 역), 찬다나(찬다나 역)
배급 필름다빈
2017 18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감독상
2017 18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우수상
2017 16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2017 42회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초청
2017 22회 인디포럼, 신작전
2017 19회 부산독립영화제, 한국독립영화초청
2017 6회 광주독립영화제, 지역영화교류전
2017 4회 한중청년꿈키움단편영화제, 초청
2017 오! 재미동 단편영화 개봉극장, 9월의 상영작
2018 1회 부산청년영화제, 초청

혜영, 혜영씨 Hye Young, Miss Moon
2021|한국|드라마/로맨스|128분
감독 김용삼
출연 문혜인(혜영 역), 김용삼(성우 역), 이태경(혜성 역), 고유준(성준 역),
찬다나(찬다나 역), 장병기(치킨배달부 역)
배급 필름다빈

윤성
2019|한국|드라마/코미디|30분
감독 김영환, 김용삼
출연 김영환(윤성 역), 김용삼(성우 역), 서원영(원영 역)
제작/각본 김영환
촬영/조명/녹음/편집/음악 김용삼
배급 필름다빈
2019 45회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초청

재경 Labyrinthos
2021|한국|코미디/드라마|35분
감독/각본/미술/편집 김용삼
PD 강동완
출연 고유준(재경 역), 김용삼(성우 역), 박지원(지원 역), 곽민규(민규 역)
배급 필름다빈
2022 9회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 도움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