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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박배일(59) 전 민주노총 대구본부장, 청암재단 대표이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운동가는 아니었다. 특별히 정파 조직에 기대어 활동하지도 않았고, 주변 동료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30대에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정리해고를 경험한 후 30년 동안 줄곧 노동운동과 장애인 탈시설 운동으로 이어온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되돌아볼 가치를 가진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역의 노동운동·사회운동가들은 그를 두고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려고 했던 몇 안 되는 노동조합 활동가’로 평가했다. 대구리스금융노동조합 위원장에 당선돼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1996년, 그의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그 무렵 은재식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처장도 박배일을 처음 만났다. 아동을 복지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기 위한 집 마련 기금을 모으고 있던 차였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박배일은 취지에 공감한다며 후원금 100만 원을 건넸다. 그 인연은 우리복지시민연합 창립 이후에도 이어졌고, 2009년 전국 최초 사회복지영화제를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함께 준비한 계기가 됐다.
은재식 사무처장은 “노동조합이 투쟁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에 동의하는 시민들의 폭을 넓혀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회복지영화제, 대안사회복지학교를 준비하면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함께 참여했어요. 대구지역에서 노동운동이 시민사회운동과 거리를 좁히는데 많은 노력을 했어요”라고 평했다.
박배일은 본격적인 노동운동과 함께 큰 시련을 겪는다. 대구리스금융이 1998년 IMF구제금융 조치 속에서 퇴출이 결정돼 청산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한국리스여신(주)에 영업을 양도하면서 박배일은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싸웠지만,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고는 1999년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수석부본부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대구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차은남 씨가 박배일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다.
2008년 민주노총 대구본부에서 집행부로 같이 일했던 차은남은 “되게 변혁적인 노동운동가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운동하면 일정을 빡빡하게 쫓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 본부장이면서도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고, 놀러도 다니고 그랬어요. 본인 스스로도 일요일에는 쉬기도 하고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와 공동사업을 많이 벌여온 박배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운동가들은 변혁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차은남은 다르게 평가했다. 차은남은 “희망버스 대구 기획단을 할 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준비했어요. 민주노총 소속이라고 하면 노조가 또 주도하려고 한다는 경계감 같은 게 느껴졌어요. 우리가 최대 대중조직이니 당연한 건데, 박배일이 시민사회와 함께 하면서 경계감을 누그러뜨린 부분을 저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요”라고 말했다.
90년대부터 노동현장에서 그와 함께한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본부장도 “동산병원 영양실분회 복직투쟁할 때 (박배일이) 단식도 했어요. 소속된 정파조직이 없다보니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도 받지만, 어떻게 보면 지역 전체를 아울러 가고자 하는, 선이 굵다고 볼 수도 있죠”라고 말했다.
르포작가로 활동하는 손소희 씨는 2006년부터 박배일과 3년 동안 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현 공공운수노조 대구지역지부·경북지역지부)에서 대구와 경북의 새로 생겨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 활동을 함께 했다. 그는 박배일을 “작은 손가락이라고 해서 배제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고, 내 식구를 챙기려고 애썼던 사람이에요. 새로 생겨나는 노동조합은 조합원 수가 적지만, 나중에는 큰 결실을 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코피터질 정도로 활동했어요”라고 전했다.
손소희는 “새로 생겨나는 노동조합은 단체협상부터 모든 게 쉽지 않았는데 책임지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마지막에는 교섭하는 중에 협상 위주로 가는 경향이 있고, 이런 걸로 갈등도 했구요.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단순히 박배일 한 사람의 문제나 노동조합 힘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갖는 한계, 내지는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박배일은 2015년 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장에 당선됐고, 그해 사회복지시설법인 청암재단 대표도 맡았다. 청암재단은 2005년 재단 내 거주시설에서 장애인 인권침해·비리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단 공공화에 나섰고, 시민사회단체가 법인 운영에 참여를 시작했다. 내부적으로 갈등이 불거져 소란스럽던 시기 박배일은 대표 자리를 수락했고, 2018년에는 전국 최초 장애인 거주시설 폐지 선언에 나서기도 했다.
2018년 4월 17일 대구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배일은 “거주시설은 거주인들을 위해 24시간 운영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시설도 불가능하고 사고나 인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민주적으로 운영해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며 탈시설 계획을 재단의 중요한 사업으로 제시했다.
노금호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시설 문제는 노동운동 입장에서 쉬운 곳이 아닌데 책임지고 들어와서 역할을 하려고 했어요. 우리가 요구하는 만큼의 속도를 못낼 때 불만도 있었지만, 큰 원칙을 깨지 않았죠. 노동조합이 조합적 이익을 넘어서 사회적 유익을 위해 활동해야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길 했고, 그 부분을 존경했어요. 사적인 자리에서 나오는 레토릭이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고 책임지려고 했구요”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정당과 간극도 좁히려고 했다. 본인이 공직선거 후보로 나서거나 정파조직의 수장을 맡은 적은 없지만,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에 잠시 몸을 담았고, 진보신당 대구시당 창당준비위원을 맡기도 했다.
박배일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청암재단 탈시설은 노동자와 장애인단체 간 갈등 속에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30년 노동운동을 한 박배일도 괴로워했다. 그는 스스로 모든 노동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선도적인 투쟁을 벌인 운동가도 아니었지만,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사이 간극을 좁히려한 운동가였음은 분명하다. 그가 풀지 못한 문제는 남은 운동가들의 과제로 남았다.
천용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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