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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의 『반전의 시대』(서해문집, 2016)를 읽다가 한 대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지은이는 2014년 3월 16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병합한 직후에 쓴 글에서, 두 나라의 분쟁을 “카인과 아벨의 근친 증오와도 흡사한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묘사했다. 러시아 역사가 988년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에서 시작되었으니 형제의 비유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카인과 아벨’이라는 신학적 비유로 묶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부당하다.
먼저 이 종교적 비유는 두 나라를 영원히 떨어질 수 없게 한다. 러시아는 좋아라 하겠지만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러시아 역시 이 비유가 마뜩찮다. 저 비유는 러시아로 하여금 문자 그대로 우크라이나를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러시아는 여호와의 ‘빽’을 믿고 건들거렸던 아벨처럼, 서방(미국)의 뒷배를 믿고 나토 가입이라는 모험을 택한 우크라이나를 훈육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카인과 아벨 신화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했다. 여기에 정신분석학이 가담한다. 카인과 아벨을 테마로 한 종교화는 주로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순간을 그렸다. 플루그레스탄에 위치한 성 고네리(Saint-Gonéry) 성당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이라는 제목의 프레스코 벽화는 별다르다. 15~16세기에 제작된 이 그림에서 이브는 아벨에게 젖을 먹이고 있고, 그보다 두세 살 먹은 카인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둥을 꽉 잡은 채 그것을 훔쳐보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파스칼 아순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다. 그는 카인과 아벨의 비극은 여호와가 아벨의 제물만 기뻐하고 카인의 제물을 거부한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엄마 품에 안긴 아벨이 황홀하게 젖을 먹고 있는 것을 카인이 목격한 순간에 잉태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품을 빼앗긴 카인은 사는 기쁨과 활기를 일순에 잊어버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땅 자체가 사라지는 공포에 떨며, 프레스코화 속의 카인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기둥을 꽉 부여잡았다. 이때 카인을 사로잡은 감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시샘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공포)이다. 파스칼 아순은 이때부터 카인은 시기심 많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시기(envy)는 가톨릭에서 그 자체로 죄이면서 다른 죄와 악습을 부르는 칠종죄 가운데 하나로, 카인은 이 죄를 설명할 때마다 사례로 끌려 나온다. 먼저 태어난 형제는 새로 태어난 형제를 견제하고 시기한다. 그 이유는 새 경쟁자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극도의 불안은 자기보호책으로 퇴행(regesion)을 부른다. 멀쩡하던 4세 아이가 동생이 태어나자 갑자기 말을 못하고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류의 임상 사례는 소아정신과에서 흔히 찾아진다.
퇴행은 사회적으로도 일어난다. 지난 삼일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고 했는데, 이런 인식은 오늘의 국제 사회 기준에 미달한다. 호주와 캐나다 등의 백인 정부는 원주민을 정복한 과거를 사죄하며 보상을 하고 있는데, 윤 모의 망언대로라면 그 원주민들은 “우리가 못났기 때문이에요, 사죄도 보상도 마셔요”라고 말해야 옳다. 유대인들 역시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독일을 용서해야 한다. “나라가 없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요? 덕분에 나라를 세우게 되었어요, 이히 당케 디어(Ich danke dir: 감사합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전체주의적 해석 권력’이다. 쓰잘 데 없는 문학이 그래서 쓰잘 데 있다. 문학은 전체주의적 해석 권력이 다져놓은 표준적 해석에 금을 내고 틈을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카인과 아벨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썼는데, 주제 사마라구의 『카인』(해냄, 2015)은 신랄한 풍자와 경계 없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카인은 고작 한 사람을 죽였지만, 구약성서 속의 여호와는 대체 얼마나 죽였던가? 놀랍게도 그가 가장 애용한 말은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