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18일’…멈춘 시간을 사는 사람들

[대구지하철참사 10주기①]유가족과 부상자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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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0년 전 2월1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 192명이 목숨을 잃었고, 151명이 씻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고 그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 등 유족들, 사랑하는 가족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한 희생자들, 참사는 192명의 목숨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삶까지 피폐화했다. 그날 이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수많은 부상자와 유족들의 시계는 여전히 10년 전 그날에 멈춰 있다.

10년 전 그 날의 기억
살려달라고 허리띠 붙잡은 여성…“허리띠를 풀어버렸다”
“엄마야, 불났다”…“잘못 본 줄 알았어요”

김호근(77)씨는 그날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동대구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전 9시 40분쯤 대구 남구 대명동 지하철 1호선 안지랑역에서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하필 그 전동차가 1079호. 김씨는 방화범 김대한과 같은 1호칸에 있었다. 출입구 앞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고 놀란 승객들이 김씨가 있는 출입구로 몰려들었다. 김씨는 순식간에 뒷사람에 밀려 넘어졌다. 김씨는 쓰러지면서 얼굴을 쇠 손잡이에 부딪혔고 그대로 실신했다.

10분쯤 흘렀을까. 김씨는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앞니가 부러졌고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이미 전동차는 화염에 휩싸였고, 새까만 연기가 출구를 찾아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씨는 낮은 포복 자세로 출구를 찾아 나섰다. 한참을 기어 올라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 여성이 그의 허리띠를 잡았다. “살려주세요” 김씨는 그 여성을 살리려다가 자신도 죽겠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허리띠를 풀어버렸다.

지하 1층까지 기어올라온 김씨는 상가로 대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가 쪽은 이미 출입문이 닫힌 상태였다. 닫혀버린 출입문 아래 수십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김씨는 다시 기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손수건에 물을 적시고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때마침 소방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요, 벤소 쪽에 있소. 살려주이소” 소방관의 플래시 불빛이 그를 찾았다. 긴장이 풀린 김씨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날 이후 김씨는 하루 2시간 밖에 잠들지 못한다. 잠만 들면 악몽에 시달린다. 자신의 허리띠를 잡던 여성이 자꾸 꿈에 나타나 “혼자 살려고 뿌리치더니 얼마나 잘사는지 두고 보자”고 저주를 퍼붓는다. 굿까지 했지만 지금도 낮밤을 가리지 않고 김씨의 눈앞에 나타난다. 2년 전에는 위암 수술도 받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앞산은 쉽게 올랐지만 이제는 3층 건물을 오르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린다. “사람들은 우리가 보상금을 많이 받았으니 좋겠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입니다. 10년 동안 병원비, 약값으로 다 쓴데다 정상적인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건강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1억이고, 2억이고 모두 돌려줄 수 있습니다”

박선이(가명, 71)씨도 그날 중앙로에 있는 화장품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박씨는 중풍으로 몸져누운 남편을 대신해 화장품 방문 판매사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매일 타던 전동차를 놓치고 오전 9시 30분쯤 1080호 전동차에 올랐다. 출근시간인데다 졸업시즌까지 겹쳐 전동차는 승객으로 붐볐다. 박씨는 출입문 반대쪽 창문(1079호 전동차 방향)을 바라보다가 불길을 발견했다. “엄마야, 불났다!” 박씨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 봤다고 생각한 박씨는 내릴 채비를 하며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박씨가 목격한 불은 착각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박씨가 탄 전동차로 옮겨 붙었다. 새까만 연기가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기관사는 잠시 기다리라는 방송만 두 차례 했다. 승객들이 우왕좌왕했지만 출입문은 열릴 줄 몰랐다. 잠시 후 전동차의 전기가 끊어지자, 출입문이 열렸다. 박씨는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벽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았다. 겨우겨우 개찰구까지 올라왔지만 거기서 방향을 잃어버렸다. ‘아, 이제 죽었구나’ 그 자리에 주저앉은 박씨는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발버둥 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앞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소방대원들이었다. 소방대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순간, 박씨는 정신을 잃었다.

박씨는 사고를 당한 그해 10월 중풍을 앓던 남편을 잃었다. 남편의 죽음이 사고 이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자신 탓인 것만 같아 박씨는 늘 죄스럽다. 기관지를 다쳐 말을 제대로 못하고, 폐를 다쳐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지만, 남편 생각만 하면 죄책감부터 밀려든다.

요즘도 박씨는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불을 끄고는 잠을 잘 수도 없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이유로 누구도 그들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때는 많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몸도 이렇게 오랫동안 나빠질지 몰랐다. 무엇보다 우리는 살았으니까 얼마나 다행이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 그만 죽으면 편할 것 같다”

부상자 구하고 부상 입었지만…
“대구시는 우리를 소홀히 대한다”

송창준(48)씨는 지하철참사 전날 밤 늦게 장사를 마치고 대구역 인근 찜질방에서 잠자고 있었다. 요란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고 찜질방을 나섰다. 화재를 확인한 송씨는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마스크를 구해 트럭에 싣고 화재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지체 없이 지하 1층까지 내려갔다. 지하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고 판단한 송씨가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송씨는 살려달라는 말조차 못하고 발목만 부여잡고 있는 부상자를 들쳐 업은 채 몇 번을 넘어지며 출구로 올라왔다.

송씨는 부상자를 구한 공로로 대구시로부터 감사패를 받았지만 그날 이후 건강을 잃었다. 목이 상해 말도 제대로 하기 힘들고, 손도 많이 붓는다. 머리가 아프고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당시 상황이 떠올라 몸서리친다. 제대로 잠자지 못하고 잠이 들어도 악몽을 꾸기 일쑤다. 길을 걷다가도 자꾸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도 힘들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층층마다 내렸다가 다시 타기를 반복한다. 여러 차례 스스로 목숨을 버릴 생각까지 했다. 정신과에 가도 특별한 진단이 나오지 않는다. 송씨는 그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내 건강이 이렇게 나빠질 줄 알았다면, 대구시와 정부가 이렇게 등한시할 줄 알았다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
“지난 10년의 이야기,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윤근(66)씨는 그날 작은 딸에게서 언니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큰딸은 교육대학원 1학년을 마친 뒤 신천역 인근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딸은 매일 자신의 자취방에서 차를 몰고 나와 신천역 부근에 주차한 뒤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에 가서 개인 공부를 했다. 작은 딸의 연락을 받고 신천역을 찾았지만 큰딸의 차만 덩그러니 있을 뿐, 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윤씨는 그날 이후 만사를 제쳐두고 희생자대책위원회에 출근했다. 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컴퓨터를 전혀 다룰 줄 몰랐던 윤씨는 개인블로그를 만들고 10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캠코더, 디지털카메라, 녹음기를 들고 참사와 관련된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참사 1주기를 앞두고는 딸의 일기장과 친구들의 글을 엮어 <아빠! 우리 나비집을 지어요>라는 책도 펴냈다. 딸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10년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남은 내가 할 일은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