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새해 금연 결심

12:25
Voiced by Amazon Polly

“담배는 그 특성상 독이 있고 맛이 매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면이 많다. 매운 기운이 뱃속으로 들어가면 현기증이 나고, 독한 연기가 목에 닿으면 바로 기침이 나며, 침이 흐르는 현상을 조절할 수 없다.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면 신장이 상하고 다리가 물러지며, 눈이 어둡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바로 수명을 줄어들게 하는 물건이라 삶에 도움 되는 점은 하나도 없다.”

10여 년쯤, 솔직하기 이를 데 없는 어느 금연 캠페인에서 볼 법한 내용이다. 요즘이야 감성적인 화면과 담배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극적인 이미지가 금연 캠페인의 주류를 이루지만, 10여 전만 해도 유치원 다니는 딸이 나와 아빠가 담배 끊어야 하는 이유를 위와 같이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담배의 무익함을 토로하는 이 말은 10년 전도 아니고, 무려 312년 전인 1711년 엄경수(1672~1678)라는 서울 선비가 한 말이니, 담배의 폐해가 오래되었구나 싶기는 하다.

엄경수가 남긴 이 기록에 보면, 담배에 관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엄경수의 호를 딴 <부재일기>에는 음력 1월 16일 새해 금연 결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엄경수의 아재뻘 되는 친척이 금연을 결심하면서, 엄경수 형제의 참여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엄경수의 친척 아재는 벌써 몇 년째 금연을 결심했지만, 항상 실패를 맛봤던 터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친적들에게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함께 담배 끊어 볼 요량이었다. 엄경수와 그의 동생이 어쩌다 새해 금연 결심에 참여하게 된 이유였다.

그러나 금연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엄경수의 말 대로 담배는 “참 고약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엄경수에 따르면 담배가 몸에는 백해무익하지만, 어떤 근심이나 걱정, 무료함, 불평 등을 물리치는 데 이만한 것도 없었다. 또, 지금 같은 엄동의 새벽 추위도 담배와 함께라면 너끈히 버틸만 했다. 특히 손님이 오면 항상 시로 서로를 가늠하고 교유했던 선비들 입장에서 담배는 시상을 떠올리고 창작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였다. 양반 문화에서 담배가 빠질 수 없는 이유였다.

가장 먼저 금연 포기 선언은 엄경수에게서 나왔다. 말 그대로 작심삼일이었다. 싯구 하나를 짓는 데에도 담배의 힘이 필요했으니, 멀리 치워둔 담뱃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제자리를 찾았다. 이를 본 엄경수의 동생 역시 한 달 정도 버티는 듯하더니, 이내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나마 금연을 결심하면서 친척들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금연을 약속했던 엄경수의 아재가 몇 달 버틴 게 이들 가운데 가장 좋은 기록이었다. 몇 달이나 더 참았다며 우스갯소리로 엄경수 형제를 나무랐지만, 그래봐야 오십보 백보였다. 담배가 정말 참으로 고약한 물건이기는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담배는 기존에 먹고 마셨던 기호 식품과 달리, 처음에는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었을 터였다. 조선시대 예능인들이 했던 잡희(雜戲:탈춤이나 줄 놀이 등 여러 전통 놀이) 가운데 가장 신기한 기예는 불 토하기였는데, 담배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연기를 내뿜게 했으니, 그 신기함은 다른 기호 식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담배가 술을 깨게 한다든지, 소화가 잘 되게 한다고 하니, 술이라도 한잔 하는 자리에는 으레 담배가 옆자리를 지켰다. 임진왜란 전후해서 완제품 형태로 조선에 들어온 담배는 이렇게 수요층에 파고들기 시작했고, 강한 중독성을 발휘하여 흡연자를 늘려 갔다. 1610년 이전에는 주로 완제품 형태로 담배를 들여왔지만, 1613~1618년 사이가 되면서 아예 담배의 씨를 들여와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담배는 상인이나 농민들에게 최고의 블루 오션이었다. 담배의 중독성은 한번 고객을 영원한 고객으로 만들었고, 수요층도 양반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강한 신분과 남녀의 벽을 담배는 이때부터 가볍게 넘었다.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조선인들이 4~5세 때부터 담배를 피운다고 기록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흡연자들이 하멜의 눈에 띄었을지 짐작된다. 게다가 담배는 조선시대 상황에서 다른 물산에 비해 보관이나 유통이 편했다. 같은 무게의 다른 물품에 비해 담배는 훨씬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오죽하면서 1711년에 엄경수는 벌써 장사꾼들이 이 물건으로 재화를 벌어들이니 그 형세로 보아 영원히 세상에 유통되어 금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토로했을까!

이는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담배는 다른 농작물에 비해 환금성이 높았다. 농사를 짓기만 하면 상인들이 비싼 값으로 사가니 요즘 말로 판로 걱정도 없었다. 이수광이 1614년을 전후해서 <지봉유설>에 남긴 기록을 보면, 밭에 곡식보다 담배를 더 많이 심는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담배는 장사하는 사람들과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통해 벌어들이는 돈에 중독되게 했다. 사회의 문화와 경제적 매커니즘이 담배를 끊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러니 개인의 의지로 금연을 실천하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금연은 2023년을 시작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새해 가장 어려운 화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행히 문화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담배를 권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공공연한 담배 광고는 불법이 되었고, 금연은 개인을 넘어 가족과 친구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담배가 들어오고 400년이 지났다. 정부의 재정 당국이 담배에서 얻는 세수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금연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몫이 될 수 있다. 흡연자들의 권리가 문제 될 정도이니, 많이 변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금연의 성공은 쉽지 않은 길이다. 금연을 결심한 분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