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글라스 공장 밖에서 9년을 보낸 22명의 노동자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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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넘어서는 일군의 남성들. 대중교통이 부족한 구미에서 아침부터 붐비는 버스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 차를 몰고 오고도 공장까지는 못 넘어가기에, 근처 대로변부터 비탈길을 걸어 오르는 이들의 얼굴. 하나같이 먹구름이 낀 듯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문에 선 경비는 남성들의 표찰과 휴대전화 카메라 보안 스티커를 확인한다. 찌푸린 표정으로 보안 점검을 마친 이들은 말없이 공장으로 흩어진다. 탈의실에서 똑같은 잿빛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정규직 업체 한 곳과 하청업체 세 곳의 작업복은 모두 잿빛이지만, 자세히 보면 카라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노동자들은 더러는 컨베이어 앞에, 더러는 지게차로, 더러는 검사실로 뿔뿔이 흩어진다. 컨베이어는 1층 전역을 채우고 있다. 검사실은 2층이다. 2층에는 정규직 직원들이 공정을 감시하는 CCTV 화면과 업무 지시용 전화기가 놓여 있다. 벽면에는 비정규직 조별 생산 실적이 적히는 ‘월별 생산 실적 전용 게시판’이 걸려 있다.

길게는 수년 한 공장 안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서로 마주 볼 일이 없으며 그래서 말 한마디 섞을 일도 없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도무지 없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은 이들이기 때문에 학연, 지연, 혈연 뭐 하나 대 볼 것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생산 실적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관계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건 잿빛 표정밖에 없다. 이곳은 구미 아사히글라스(AGC화인테크노한국) 공장이다.

구미로 흘러온 사람들 오수일 #1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회 오수일 조합원

부산 출신 오수일(50)도 피곤함에 절은 표정으로 공장에 들어섰다. 정문을 넘어서면 담배 생각이 났으나, 정신 차리면 어느새 기계가 된 듯 유리판을 자르고 있다. 오수일의 조는 1층 구트 공정. 거기서도 오프 1라인이다. 단순반복 작업인 구트 공정은 창의력보다 체력과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다른 조와 생산성 경쟁을 해야 타박을 면하기에, 박차에 차이는 말처럼 일해야 했다. 성취감 따위 얻을 길이 없는 것이다. 2013년 처음 아사히글라스 공장 문을 두드렸을 때 오수일의 얼굴은 지금의 얼굴과 달랐다. 사업에 모조리 실패한 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에 입사한 오수일의 표정에는 절박함과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초 단위로 옥죄는 생산작업이 그 모든 표정을 분할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수일은 사실 두 번 다시는 공장 노동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 있다. 더럽고 서러운 꼴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산업재해를 당해봤고, 직접 인력 파견업체를 운영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도 겪어봤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가끔 보는 사장 오수일을 찾아 하소연하곤 했다. 그렇지만 바지사장에 불과한 오수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아사히글라스에 흘러오게 된 걸까.

***

오수일의 첫 직장은 달성공단 섬유공장이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녔지만 일찍이 그만두고, 외삼촌이 운영하는 공장에 들어가게 됐다. 혈육이라고 특별히 사정을 봐주지는 않았다. 천막이나 다를바 없는 기숙사에 살았고, 월급은 수중에 들어오지 않고 부모님께 보내졌다. 원사가 직물이 되기 바로 전 원사에 풀을 먹이고 크기에 맞게 빔에 감는 일인데,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했다. 쉬는 날도 없었다.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지저분하게 느껴졌고, 같이 놀던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먼지 묻은 얼굴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견디다 못한 오수일은 공장을 뛰쳐나왔다. 공단에서 무작정 아무 버스를 타다, 좀 떨어진 다른 공단에 내려 그곳에서 취직했다. 삼촌 공장보다는 조금 나았고, 월급도 줬다. 첫 월급은 30만 원. 그때부터 오수일은 좀더 나은 공장을 찾아 공단을 전전했으나, 특별히 더 나아지는 건 없었다. 옆에서 산재를 당하는 동료들도 더러 목격했다. 검정고시 공부를 결심했다. 평생 일하고 산다 생각하니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무리했던 탓일까. 오수일은 야간근무 도중 풀 먹인 원사를 감는 롤러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몸이 딸려가는 찰나, 다행히도 옆에 있던 사람이 급히 안전바를 내려 목숨은 건졌다. 8개월간 입원 치료 후 다시 일해보려 했는데, 롤러 앞에 서면 겁부터 나는 바람에 일을 할 수 없었다. 그길로 공장을 그만뒀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그만두기 전 공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달성공단 앞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신혼집은 달성공단 근처 13평짜리 반전세로 잡았다. 회를 떠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에게 팔았다. 공장에서 벗어나는 줄 알았더니, 손님에게 공장 돌아가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됐다. 친구와 한잔 걸치러 온 주민도, 새벽에 퇴근한 노동자도 고된 몸을 술로 달래는 듯했다.

자리를 잡아가던 포장마차는 1년 만에 끝내야 했다. 장사가 점점 잘 되어가니 민원 신고도 늘었다. 마침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다. 돈 벌 길은 장사밖에 없었다. 당구장을 열었다가 실패했다. 아내와 함께 커피를 타서 달성공단과 상가에 배달했더니 사업이 번창했다. 하지만 이도 안정적인 사업화에는 실패했다. 인복이 있어 여러 시도를 해볼 수는 있었다. 병원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원장의 눈에 들어, 일하면서도 방통대 진학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다. 경영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차, 구미 대기업에서 일하던 친형의 연락을 받고 구미행을 결심했다.

대기업에서 쌓은 인맥을 무기로 식육점 영업을 해보자는 제안 때문이다. 구미에서는 대기업 인맥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형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IMF 이후, 구미 공단은 산업 재편이 한창일 때였고 이는 형이 속한 대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즉, 퇴직 사원들의 자영업 진출로 인해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기였다. 그 대기업에서 퇴직해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형뿐만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고기를 떼와 발골 작업을 했는데 급여는 나오지 않고 빚만 늘었다. 고기도 팔리지 않고 쌓여갔다.

거리에 나앉을 수는 없어 골몰한 결과, 오수일과 형은 인력 파견업체를 차려보기로 했다. 공단에서 아웃소싱이 확산되는 추세를 겨냥한 사업이었다. 사업은 상당히 잘 풀렸는데, 자리를 잡는가 했더니 형이 갑자기 러시아로 떠났다. 퇴직한 회사에서 러시아 파견직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100명 가까운 사원들을 공장에 파견했는데, 형이 떠나고 1년이 지나니 30명으로 떨어졌다. 원청업체 직원들 술 접대를 해도, 아무리 급한 구인 조건에 맞춰줘도 인맥 없이는 쉽지 않았다. 2010년도에는 본격적으로 원청 출신 퇴직자들이 용역업체를 차리는 사례가 나왔고, 그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용역업체가 늘어나니, 원청 사이에서도 영업이익을 적게 책정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12%이던 영업이익은 5%까지 줄었는데, 급기야 4대 보험까지 떠넘기기 시작했다.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인도급 사업 자체도 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업은 오수일의 내면을 갉아 먹었다. 원청이 책정한 인건비에서 오수일이 수수료를 가져갈수록 그만큼 노동자에게 가는 비용은 줄어드는 구조였다. 인도급 업체로 밀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딱한 처지였는데, 자꾸 마음에 걸리는 얼굴들이 늘었다. 그 사람들에게 오수일은 급여가 깎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악조건에서도 말없이 일하던 젊은 여성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이 원청 정규직 직원에게 성희롱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수일이 사업을 위해 여러 차례 별도로 접대해야 했던 그 업체였다. 고깃집에서 마주한 원청 관리자들의 얼굴은 거침없었다. 생기 없는 비정규직의 얼굴에서 보지 못한 표정이다. 피해 직원이 나서지 않았지만, 오수일은 원청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변하는 건 없었다. 성추행에 대해 하청업체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수일은 사업을 접기로 했다.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교차로를 펼쳐 들었다. 거기서 아사히글라스 사원 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오수일은 다시는 공장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접고 절박한 얼굴로 아사히글라스로 향했다.

▲구미 4공단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 선 오수일 조합원.

노조결성 막전막후
오수일 #2

2013년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 GTS에 입사한 오수일. 오수일은 취직할 때부터 일반적인 하청업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일은 아사히글라스 공장에서 하지만, 소속은 하청업체다. 면접도 아사히글라스 공장 경비실 입구에서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받았다.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아사히글라스에 대한 첫인상은 작업환경은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업은 그렇지 않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해서 작업하는 2층 콜드 공정과 다르게, 1층 구트 공정에서 정규직은 대체로 작업 감독 역할을 맡았다. 정규직은 딱딱한 표정으로 제품 상태 확인을 위해 눈을 부릅떴고, 그럴 때마다 오수일은 불안감을 느꼈다.

“급여는 GTS가 떼고 남은 걸 받겠구나. 불법파견이구나”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농성장에서 만난 오수일 조합원

오수일은 본능적으로 ‘줄’을 찾기 시작했다. 줄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원칙은 사업하는 동안 뼈저리게 느꼈던 바다. 하지만 관리자 비위를 맞추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직장에서는 같은 조에 속한 동료라고 해도 친분을 쌓을 계기는 없었다. 타인의 실수가 모든 구성원의 피로도를 높이는 만큼,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가까웠다. 입사 후 2년이 지난 2015년, 오수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어졌다. 용역업체를 운영할 때 봤던 젊은 직원들의 얼굴이자, 지게차 단도리 작업으로 쉴 틈 없이 유리판을 갖다 놓는 박성철의 얼굴, 절단 작업 중인 허상원의 얼굴이 됐다.

여느때처럼 피로한 표정으로 라인 앞에 서 있을 때, GTS에 노조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만으로는 체감되는 바가 없었기에 오수일은 노조가 있으면 식단은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를 했다. 입사 초기 밥을 두고 라면을 먹는 동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며칠 만에 깨달았다. 사람 먹을 밥을 주는 게 아니구나. 국과 밥은 식었고, 국에는 식은 기름이 둥둥 떠다닌다. 급여가 충분하리라 기대한 적은 없다. 하지만 못 먹을 밥을 준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회사가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용역업체를 운영하던 시절 젊은 직원들이 공장에 정을 붙이지 않고, 한 곳에서 터를 닦아가지 않았는지 체감하게 됐다. 어딜 가도 따뜻한 밥 한 끼 대접받질 못했을 것이다.

같은 조 동료 손에 이끌려 오수일은 한 식당에 들어섰다. GTS 내에서 노조 결성을 준비 중이며, 그에 대한 설명을 하는 자리였다. 생산 라인에 있을 때는 제대로 살펴볼 새도 없었는데, 둘러앉아 동료 얼굴을 보니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조 결성과 그 이후 가능한 회사의 탄압에 대해서도 설명을 듣고 보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해고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소상하게 설명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으로 구슬리는 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2층 콜드 공정에서 일하는 차헌호다. 차헌호는 훗날 노조 지회장이 된다.

[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해고노동자들은 어떤 일을 했나

안진석 #1
님, 놈, 새끼
‘새끼’가 노조 가입을 결심한 이유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 농성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진석(왼쪽), 조남달(가운데), 오수일(오른쪽)

노조 결성을 모의하는 식당, 그곳에는 안진석(51)도 앉아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안진석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정규직이라면 모를까,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어서 회사를 바꾼다? 그런 건 그간 거쳐온 수많은 회사에서 보고 들은 바가 없다. 속셈이 무엇일지 속으로 생각하던 안진석은 괜히 비딱한 심정이 돼, 설명을 듣던 도중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안진석을 향해 설명하던 사람의 마지막 한마디가 뒤따라온다. “노조는 기회예요. 이 기회를 잡으면 신세계가 올 거예요.”

식당에 같이 가보자고 했던 동료가 따라 나왔다. 안진석이 말했다.

“형님요. 예를 들어 드릴게요. 이 가게 봐요. 돈 발라서 인테리어 하면 장사는 시작할 수 있겠죠. 그런데 장사가 잘되고 맛집으로 소문나는 건 별개예요. 노조가 잘 될 거 같아요?”

***

출근 날. 안진석은 구트 공정 중 세정라인에서 일한다. 절단 작업 중인 오수일의 맞은편이다. 흠결이 있는 유리판이 오프 라인으로 넘어오면 세정과 절단을 거쳐 양품으로 만들어진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작업지시서대로 단순 반복 작업을 하면 된다. 정규직이 컨트롤 박스로 세정기에 투입되는 수압과 롤러의 속도를 조절하면 안진석은 그에 맞춰 유리판을 씻어내면 됐다. 안진석은 이따금 작업장을 지나가는 정규직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님, 놈, 새끼···”

비정규직 일터를 전전하며 안진석이 깨달은 말이다. 사람에는 ‘님, 놈, 새끼’가 있다. 비정규직은 새끼다. 어딜가나 똑같이 인간 이하 취급을 받는다. 부양가족에 대한 부담이 없는 안진석은 많은 급여보다는 많은 휴식을 선호했다. 그런데 비정규직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잔업에서 자유로운 공장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사히글라스는 여러 공장을 옮겨 다니다가 잔고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쉬던 차에 사원 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노후 안정을 위해 변액연금보험에 들었는데 보험료가 간당간당했고, 일단 적당한 회사에서 급여를 받아 메꿔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사히글라스 생활을 시작했다.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농성장에서 만난 안진석 조합원

회사에서 사람다운 대우는 기대하지 않았다. 비정규직이란 것이 원래 사업 실적이 줄어들거나 비수기가 되면 언제든지 자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태 그렇게 대우받았다. 언제든 자르려면 언제든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안진석은 습관처럼 어느 일터를 가더라도 정은 붙이지 않으려 했다. 내가 ‘새끼’니까 너도 ‘새끼’로 생각하려 했다. 단조로운 작업을 이어가던 중, 안진석의 머릿속에 ‘님, 놈, 새끼’ 말고 다른 한 단어가 떠올랐다. “신세계란 어떤 걸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노조에 가입해보기로 했다. 잘리면 다른 공장에 가도 문제없다는 심정이었다.

단결투쟁 머리띠를 매고 출근하다
노조 결성하자 178명 해고
오수일 #3 안진석 #2

노조 활동을 하면서 하는 일 어떤 것도 오수일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운 일은 딱딱했던 얼굴에 새로운 표정을 불어 넣었다. 사람 취급받아보자고 시작한 노동조합, 막상 시작하고 보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동지라는 말, 투쟁이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어디선가 툭툭걸리는 느낌이었다. 긴가민가하는 심정인데 동료들이 단결투쟁이라 적힌 빨간 머리띠를 매고 출근하자고 했다. 노조가 결성되고 처음 회사에 교섭을 요구한 뒤, 기세를 보여줘야 하는 시점이었다.

아직은 노조 활동에 얼떨떨한 심정이던 오수일. 다른 조합원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머리띠를 매고 가기로 했는데 라인 앞에 서보니 오수일의 조원들은 머리띠를 매고 있지 않았다.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벗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쉬는 시간까지 한 시간은 버티겠다고 눈을 질끈 감은 오수일은 휴식 시간 담배를 피우러 가면서 머리띠를 벗었다. 속았다는 심정과 함께 짧은 휴식 시간 뒤 돌아온 오수일의 눈에 뭔가 울긋불긋한 것이 보였다. 다른 조원들이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가슴 한쪽이 뭉클했다. 말없이 머리띠를 다시 맸다. 여전히 쉴 새 없이 판유리가 속속들이 도착하는 공장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곳이 된듯했다.

안진석도 공장에 들어올 때 나눠 받은 머리띠를 질끈 묶었다. 잠시 집중을 받는 느낌이 드나 했더니, 같은 조 사람들도 모두 묶은 모습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 이전에 라인마다 벽이라도 있는 듯 다른 노동자들과는 담을 쌓고 지냈는데 머리띠를 매고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벽이 사라진 듯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하나라는 느낌. 노동자들은 무슨 일이라도 생길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규직과 관리자들은 머리띠를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얼마 뒤 교섭 공지문이 붙었다. 거기에 적힌 문구가 마음에 꽂혔다. ‘귀 노동조합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귀 노동조합이라, ‘새끼’가 아니고 ‘님’이 아닌가. 교섭이 열리는 며칠간, 노조 활동을 막 시작한 조합원들은 기세가 올랐다. 쉬는 시간 짬을 내 모여 투쟁가를 불렀다.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과연 신세계란 말인가.

짧은 해방감은 달콤했다. 2015년 6월, 안진석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회사 전기공사가 있으니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였다. “노조가 생기니 이런 일도 있구나, 개꿀!”이라며 안진석은 놀 계획을 세웠다. 오수일도 얼떨떨한 심정으로 뜻하지 않게 생긴 휴일을 면허증 갱신에 활용했다. 친구와 오랜만에 점심을 먹을까 연락하려던 차, 노조에서 긴급 소집 문자가 왔다. 휴일이 아니라 해고라고 했다. 오수일은 공장으로 차를 돌렸다. 공장 앞에는 차량과 출근하려는 사람들, 용역 경비와 경찰이 뒤엉켜있었다. 야간 근무를 마친 조합원들은 공장 안에서, 쉬는 날인 줄 알고 시간을 보내던 조합원들은 공장 밖에서 어쩔 줄 모른 채 발을 굴렀다. 노조는 천막농성을 하기로 판단했고, 그때부터 공장 앞에 천막이 펼쳐졌다. 수가 달리자 당장 인근 공장 노동조합(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힘을 보탰다.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은 경찰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노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봐야 할 것은 쫓겨난 사람들이 아니고 공장을 가로막은 사람들이 아닌가. 다시 ‘새끼’가 되어버렸다. 경찰의 얼굴들을 본 순간,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의지는 없었던 안진석의 마음에도 불이 붙었다. 끝까지 가 보기로 결심했다.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농성장에서 만난 안진석 조합원

“전기 공사 때문에 하루 쉬라고 했는데요, 일이 생겼다고 해서 공장에 딱 오니까, 경찰이 쫙 깔려 있는 거예요. 해고당해봤어요? 적어도 인수인계라든가, 정리할 시간은 준다고요. 어딜 가도 이렇게 문자로 하루아침에 해고하는 곳은 없어요. 그것도 억울한데 경찰들이 우리를 막아요. 짐은 그대로 공장 안에 있는데 말이에요. 그때 발작 버튼이 눌렸죠.” (안진석)

“계약기간도 안 끝난 상태였거든요. 출근하려는데 경찰이 막더라고요. 용역경비랑 같이 섞여 있더라고요. 왜 경찰이 거기 있어요. 절차를 지켰거나 합당한 이유라도 있는 해고 같으면 모르겠는데요. 우리더러 공무집행방해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아니잖아요. 그 길로 천막농성을 시작했어요.” (오수일)

떠난 것과 남은 것
오수일 #4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조합원이 안진석 조합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78명이 길바닥으로 내쫓긴 뒤, 공장으로 돌아가려는 투쟁이 만 7년을 넘길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합원은 22명으로 줄었다. 해고 직전, 오수일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할부로 차를 한 대 샀다. 아이를 낳고부터 장사에, 영업에 힘을 쏟느라, 아사히글라스에서는 주말 특근에 나서느라 제대로 가족여행 한 번 못 갔다는 생각에 SUV를 뽑아 가족 나들이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지금도 여전히 실행하지 못했다.

해고자가 되니 더 바빴다. 길바닥에 앉은 처지가 되니,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오수일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았다. 천막을 치고 부서지며, 다시 치고 부서지는 걸 반복하는 동안, 아사히글라스를 고발하고 소송을 제기하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해고 2년이 되도록 어떤 것도 진척은 없었고, 오수일과 해고자들은 절박해졌다. 2016년 김앤장 대항 투쟁,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도 나섰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다른 투쟁을 계획했다. 고공농성이다. 2017년 4월, 오수일은 서울 광화문 광고탑에 올라 고공농성에 돌입해, 27일 동안 탑 위에서 단식 투쟁을 벌였다.

▲2017년 4월 14일 광화문 인근 건물 광고탑에 오른 노동자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조합원도 포함됐다. [사진=아사히비정규직지회]

끝장을 볼 생각으로 올라온 고공농성장. 본인이 올라가겠다는 차헌호를 뜯어 말리고 올라온 농성장은 또 다른 세계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의장에서 고공농성에 자원하고 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나긴 했다. 단식해본 적도 없긴 했지만, 고공농성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소름 끼치는 면이 있었다. 사흘 동안은 긴장감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몰랐다. 나흘째부터는 농성장 아래 숯불고기집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오수일과 함께 농성하는 이들을 괴롭혔다. 더욱 괴로운 일은, 2017년 5월 농성장에서 보이는 광화문 광장에서 문재인 후보 연설이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이 농성장에서도 들렸다. 오수일은 지척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며 후보가 농성장을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오수일은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함께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다. 기약 없는 앞날, 광화문 광장을 함께 내려다보며 오수일은 지금 비록 몸은 고되고 굶주렸다 하더라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닮아있다면 제법 괜찮은 얼굴이리라 생각했다.

때로 흔들리는 날도 있었다. 가족들을 떠올리면 그랬다. 철탑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농성에 들어서고 나서야 알렸다. 아내는 상경해 고공 농성장 철탑 밑까지 올라와 전화를 걸었다. 사실상 외벌이가 되어버린 아내는 고관절 상태가 악화해 수술받은 몸이었다. 가족이 벼랑 끝까지 몰린다는 심정에, 불쑥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도 떠올랐었다. 하지만 철탑 아래에서 아내는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았다. 철탑 위에서도 아내의 입 모양과 눈물이 또렷이 보였다.

“애들은 잘 있나.”
“올라가 있는 사람이 걱정이지. 잘 있다. 당신 몸이나 잘 챙겨.”

아내에게 응원받는다는 느낌이 들자,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수일 #5 안진석 #3

투쟁이 해를 두 번 넘기고 나서부터, 해고자들은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기약 없이 흐르는 시간이 해고자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해고 직후 하라노 다케시 당시 아사히글라스 대표이사 등 관계자들을 불법파견 혐의로 고소했는데, 검찰은 오래 시간을 끌다가 2017년 12월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했다. 담당 검사는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국외 훈련을 받은 김도형 검사(사법연수원 39기)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해고 초기, 억울한 심정으로 공장을 찾는 해고자들에게 경찰과 구미시가 보인 얼굴이 회사의 얼굴과 닮아있었고 해고자 편은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청이 2년 넘는 기간 수사 끝에 관리자들의 불법파견 혐의가 있다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의아했다.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할 거면 왜 3년 가까운 시간을 끌었을까. 오수일은 실망감을 느꼈지만, 절망감은 아니었다.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내몰려도 버텨내는 일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해고자들은 대구고등검찰에 항고했다. 대구고검은 4개월여 뒤 재기수사명령을 내렸지만, 결과는 빨리 나오지 않았다. 2018년 1월, 해고자들은 대구지검 앞 인도 위에 천막농성장을 만들었다. 불법파견 사건은 급기야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안건으로도 올랐지만, 검찰은 도무지 기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18년 12월 27일 오후 1시께,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 11명은 대구지방검찰청 1층 로비에 모여 박 지검장 면담을 요청하며 연좌하고 있다.

2018년 12월, 대구지검이 미적대며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을 때, 해고자들은 대구지검 1층 로비를 찾았다. 대구지검 로비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해고자 11명은 이날 박윤해 대구지검장 면담을 요구하며 로비에 주저앉았다. 수사기관 점거 농성은 구속과 처벌도 감수해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해고자들은 그만큼 절박했다.

안진석은 이날 ‘아사히글라스 기소하라’라는 간명한 문구가 적힌 피켓을 손에 쥐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투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질 것이고, 변곡점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노조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오수일,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로비에 눌러앉았다. 즉각 경찰 기동대가 출동했고, 청사 입구는 파이프 셔터로 막혀 출입이 통제됐다. 안진석은 경찰 기동대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사히글라스 직원이 아니라고 하는, 계약 해지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려면 불법을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다. 그래도 무섭다. 무서워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우리 투쟁의 중요한 순간이다. 나 혼자는 못한다. 불법이라고 해도 좋다. 함께 하면 감수할 수 있다.”

로비 바닥으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 오수일은 한기를 느끼면서도, 어떤 생각에 이르자 불현듯 마음이 벅차올랐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다가 이곳에 몰려온 10명의 동지들이 있다. 이들과 함께 처벌도 각오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살아오며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이 동지들과는 무엇을 해도 되겠다. 설령, 투쟁 끝에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후회는 하지 않을 거다.” 가슴이 뜨거웠다.

▲2018년 1월 31일 2백여 명은 금속노조가 주최한 아사히 무혐의 처분 검탈 규탄 집회에 참석 후 대구지방검찰청 앞으로 이동했다.

오후 7시 40분, 로비에 들어오지 못한 다른 해고자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항의를 뚫고 들어온 경찰이 연행을 시작했다. 쌀가마니처럼 들려가는 해고자들의 찌푸린 얼굴 사이로 언뜻 미소가 맺혔다. 물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방감. 그리고 단절이 아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이 미소가 바로 투쟁하는 동안 얻은 새로운 것이다.

2019년 2월, 수사심의위원회는 검찰에 기소를 권고했다. 같은 달 15일, 대구지검 김천지청은 불기소를 뒤집고 아사히글라스 당시 대표 하라노 다케시, 하청업체인 GTS 대표 정재윤을 파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2019년 4월, 이들을 처음으로 법정에 세웠다. 2021년 8월,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형사1단독(재판장 김선영)은 파견법 위반죄로 하라노 다케시 전 아사히글라스 대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정재윤 전 GTS 대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돌아가고 싶은 구미 아사히글라스 공장 입구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안진석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비정규직화에 발맞춘 구조조정 계획 ‘S 프로젝트’

구미 공단은 산업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화도 심화했다. 아사히글라스의 사례처럼 기존에는 정규직이 하던 업무가 외형상 사내하도급의 형태로 전환되는 방식이 확인된다. 또, 구미 공단의 산업 재편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아사히글라스 차원의 구조조정도 진행됐다.

구미에서는 1960년대부터 전자공업과 섬유산업이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전자공업은 LG(당시 금성)와 삼성, 대우를 필두로, 섬유산업은 제일합섬, 코오롱 등 굵직한 기업이 규모를 키웠다. 노동 집약 산업인 섬유산업은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가 비교우위에 있었고, 점차 쇠퇴했다. 2000년대 들어 구미는 전자공업이 치중하던 디스플레이 산업 또한 쇠퇴했고, 모바일 산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아사히글라스 공장으로 들어서는 삼거리에는 해고자들의 농성장이 있다. 9년 세월 동안 부서지고 다시 서기를 반복한 농성장은 해고자들의 모습을 닮아 있다. 주간 근무조 퇴근 시간 무렵, 어두워지는 겨울 한기가 농성장을 휘감는다. 농성장 안으로부터 전등 빛 한줄기가 흘러나온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대화 소리, 저녁으로 먹을 떡국 냄새도 흘러나온다. 1월 18일, 설을 앞둔 저녁 문화제에 앞서 해고자들이 한데 모였다.

해고자 신분으로 맞이하는 8번째 설날. 부당해고 투쟁이 길어지며 오수일은 본가에 발길을 끊었다. 둘러앉은 조합원들의 모습도 오수일과 다를 바 없다. 이제는 농성장에서 동료 얼굴을 보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다. 이 자리에서 화두는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형사사건을 맡은 김앤장이다. 일주일 전인 1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형사사건 2심 결심 공판을 방청한 조합원들은 김앤장 변호사의 최후변론에 혀를 내둘렀다. 변호사는 지난 7년이 회사에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지난 7년은 저희 회사에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재판부에 간절한 호소를, 읍소를 드립니다. 일본 회사가 설립한 회사라서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용을 창출하고도 사법적 사건에서 국내 회사보다 불이익을 받은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선입견 없는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앙망드립니다.···파견법은 IMF 상황에서 일부 업종에 파견을 허용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법의 취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재판부가 파견관계를 인정하면 도급회사는 근로자를 모두 고용하고 정년까지 보장해야 하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중대한 상황입니다···”

당시 공판에 참석했던 오수일은 단박에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힘든 시간이었다고. 그렇다면 그건 누구 잘못인가. 애초에 노조만 인정했어도, 이렇게 해고시키지만 않았어도 벌어질 일이 아니었는데. 갈등도 없었을 것이고, 저 앞에 앉은 변호사에게 엄청난 수임료를 낼 일도 없었을 텐데. 누가 자초한 일인가. 누구 탓이란 말인가···

민사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도 1, 2심 모두 승소했고, 형사인 파견법 위반 사건도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상황. 오수일은 해고자들의 투쟁이 승리를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간다고 느낀다. 그래서일까. 한때, 승소 가능성을 낮게 점쳐서인지 회사 측이 해고자들에게 접선을 타진한 적 있다. 그때 차헌호와 오수일은 해고자 대표로 회사와 만났다. 처음은 법률대리인들과 만났고, 그다음은 회사 관리자도 참석한 자리였다. 회사는 이들에게 조건부로 복직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차헌호를 빼고 복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복직 대신 위로금을 원한다면 큰 금액을 지급하겠다고도 했다.

오수일이 물었다. “22명은 안 된다는 거네요?”
차헌호도 물었다. “나만 빼면 된다는 말입니까?”
“···”

오수일은 뒤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조합원들끼리 합의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이란, 첫 번째로 22명 전원 복직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 복직 후 노조활동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결과는 결국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많은 것을 타협해야 하고, 그렇다면 투쟁의 성과로 쟁취할 ‘노조할 권리’ 또한 불확실한 상황에 놓일 것이 자명했다. 오수일과 차헌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훗날, 해고자들은 타협이 아닌 정당한 권리를 법원에서 인정받아, 회사로부터 미지급 임금 64억 원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이끌어냈다. 원칙을 고수한 결과다.

결국 해고의 부당함이 인정되리라 믿는다. 이를 위해 보낸 7년의 세월을 되짚어보면, 그 시간이 승리를 향해 가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마냥 기쁨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해고자들은 ‘만약 아사히글라스가 애당초 여느 회사처럼 노조를 인정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물음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더 나아가 불법파견을 해소하고 정규직으로 고용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가정해보는 것은 덧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쟁을 위해 담보건 것이 그만큼 크기에 불가피한 상념이기도 하다.

천막에 둘러앉은 해고자들이 저마다 상념을 꺼내 본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김정태 조합원

“회사 다니면서 노조 활동을 한다면 그 나름으로 배워나가는 게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평범한 조합원으로서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했을 거 같아요. 20대에는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도 없어졌어요. 그보다 노조하면서 배운 게 많아요. 나만 부당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지금 와서 아쉬운 게 없고, 다시 돌아가도 노조 활동을 했을 거 같아요.” (김정태)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송동주

“그 상황에 안주하면서 살았을 거 같아요. 취미생활도 많이 했을 거 같은데, 낚시를 좋아하니까요. 지금 여자친구 만나고 있거든요. 해고되고 여자친구를 만났다. 만약에 해고가 안 됐으면 못 만났겠죠. 집회 때 알게 됐기 때문에…지금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 같고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송동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박성철

“예전에는 50 넘어가면 자유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해고되고 나서 회사가 돈 받고 나가라고 했을 때, 고민했어요. 서류를 집에 보내서 집사람이 그걸 봤는데, 어쩌고싶냐더라고요. 끝을 보고 싶다고, 현장에 돌아 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집사람이 투잡하고 있을 때거든요. 일단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고맙죠. 미안하고. 그런데 이제 한계를 향해 가는 거 같아요.” (박성철)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장명주

“해고 안 됐으면 안에서 노조 활동을 잘 했겠죠. 사람들과도 더 친해졌을 거고. 휴게시간, 밥먹는 시간, 작업복 문제 많은데 이걸 개선했을 거 같고, 좋은 환경에서 일했을 거 같아요. 사내에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동호회가 특별히 없었거든요. 동호회 활동도 해서 좀더 윤택하게 지냈을 거 같네요.” (장명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김태우

“가족들과 놀러도 많이 다니고, 여행도 다녔겠죠. 사실 여행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옆에서 자꾸 가자고 해서요. 지금은 못 가죠. 아이들도 못 챙겨주고. 해고 됐을 때 학생이었는데, 내가 바깥으로 많이 다니니까 신경을 못 썼어요. 정말 미안했죠. 그래도 지금은 이해해주고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김태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민동기

“가족과 갈등이 제일 아쉽죠. 부모님은 여전히 데모하는 걸 못받아들이세요. 친구들과 관계도 소원해졌고, 결혼 생각도 안 하게 됐어요. 예전에 나는 융합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노조하면서 많이 고치려 했고 차헌호 지회장을 만나며 인생도 많이 변했어요.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걸 배웠고. 해고가 안 됐다면, 그 상황에서도 다른 배울 게 있었겠죠.” (민동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이영민

“어머니가 여기저기 안 좋으신데, 병원에도 제대로 못 모시고 있어요. 84세이신데, 그게 제일 미안하죠. 생활이 어려우니까. 안정적이었다면 좀더 어머니께도 가정에도 잘 했을 건데. 친구들과 농지생활을 같이 하자고 얘기도 했었는데, 안정적이었다면 그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밖에 나와서 배운 게 너무 많아서, 그래서 아쉬움은 없습니다.” (이영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허상원

“잃은 게 많아요. 가족 관계도 소원해지고 신뢰도 떨어졌고. 아이들 돌봄을 못했어요. 아침에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일상이 반복됐고, 부인에게도 인정을 못 받고. 친구나 친척들과도 거리를 두게 되고요. 그런데 그만큼 생각이 덜 바뀌긴 했을 거예요. 해고 생활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알게 됐거든요. 안정적으로 살았다면 세상 살기 쉽게 생각했을 거예요.” (허상원)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김성한

“결혼 12년차라 가족사진도 찍고 하려 했는데, 형편이 안 돼서 못찍었어요. 수입이 한정적이잖아요. 미안하죠. 아이들이 아빠, 엄마 찾을 나이인데, 관심을 못 주니 미안합니다. 어른들에게도 죄송스럽고. 처갓집에 한 달에 두 번 이상 찾아갔는데 투쟁하고 1년 지나니 가기가 어렵더라고요. 주눅도 들고. 집안싸움도 생기고.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거니까. 억울하잖아요.”(김성한)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남달

“해고 뒤 가족들과 여행을 못 다녔어요. 해고만 안 됐어도 가족과 추억을 많이 만들었겠죠. 집에서 빨리 그만두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같이 놀러 가겠어요. 비정규직 삶이 나아진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네요. 그래도 노조 활동을 꾸준히 했으면 많이 나아졌을 거예요. 그걸 못 봐서 아쉬워요.” (조남달)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임종섭

“오리온전기에서 정규직의 삶을 살아봤어요. 비정규직은 기를 못 펴요. 아사히글라스에서는 전화도 마음 놓고 한 통 못했어요. 월차를 쓰려 해도 며칠 전에 예약하고 대체할 사람을 구해야 겨우 가능했어요. 해고되고 가정에서도 많이 다퉜는데, 아무래도 가정은 지금보다 나았겠죠. 집안도 더 화목했을 거고요. 검찰이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지. 처음에는 1년, 2년 세다가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날짜를 안 세게 됐어요. 그러면 침울해 지거든요.” (임종섭)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황태섭

“살기 좋았겠죠. 결혼도 했을 거 같고. 직장을 안 다니고 생계 나가서 일은 하고 있지만, 안정적이지 않으니까 결혼은 생각하기 어렵죠. 나이는 계속 들어가고. 그래도 이렇게 길거리에 안 나와봤으면 내 삶을 돌아보고 또 노동자 삶을 알아갈 기회는 없었을 거예요. 다른 곳에 비정규직으로 또 가더라도 잘리고 옮기고 하는 삶이었겠죠. 노조가 희망처럼 느껴졌는데, 그래도 9년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회사도 우리가 이만큼 할 거라 생각 못했겠죠. 서로 처음 있는 일이에요.” (황태섭)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박세정

“노조는 이 회사가 오래 다닐 수 있는 회사가 됐으면 해서 시작했어요. 아니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겠죠. 특별한 욕심도 없이 전처럼 살았겠죠. 그런데 활동하다 보니 자꾸 자존심이 상하고,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사하는 걸 보면, 세상 모든 게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힘이 있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같이 연대해서 질기게 싸우는 수밖에 없지요.” (박세정)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한상기

“순리대로 됐다면 그건 천국이겠죠. 지금은 돈이 없어서 아이들과 어디 놀러도 못 가고 해주는 것도 없어요. 배우자에게 제일 미안하고. 같이 돈 벌어야 하니까요. 안정적이었다면 여행도 같이 많이 다녔을 거고. 저는 비정규직을 많이 겪어본 사람으로서 어려운 다른 비정규직을 도왔을 거 같기도 해요. 지금 상황이 부당한 건 회사도 알겠죠. 우리가 약하니까 눈 감고 있는 거겠죠. 대가를 다 받아낼 거예요. 복직하고나서 그 후에도 뭉쳐서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잘 해나갈 거예요.” (한상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이민우

“그냥 이렇게 해고 안 했으면 많이 달랐겠죠. 급여도 지금쯤 올랐을 거고, 나는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았을 거고. 저는 옷도 좋아하고, 목공이나 공방에도 관심 있거든요. 그런 걸 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어쩌다보니 해고되고나서 목공은 할 수 있게 됐네요. 천막 부서지고 새로 짓고 많이 했거든요. 약자란 게 아프고 힘들고 돈 없고 부실한 거잖아요. 약자는 약자라는 이유로 기회가 없어요. 억울한 일 있어도 경찰서에 갈 수 있겠어요? 참고 사는 거지. 그런데 노조 하면서, 사람이 가진 게 없으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민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권재덕

“애들 둘이 대학생인데, 등록금 문제가 있어요. 학비 때문에 단기 대출을 받아서 겨우 메우고 있어요. 현금서비스를 받거나 일하는 곳에서 미리 퇴직금을 정산해서 막기도 하고요. 지금보다 나았겠죠. 상식적인 목소리를 인정받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그동안 버틸 수가 없어서 지금은 다른 일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일마저 불법 사내하도급이죠.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권재덕)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최진석

“오래 다니는 직장이 됐을 거 같기도 하고. 워낙 한 군데 못 있는 성격이라 다니다가 중간에 나오게 됐을 수도 있을 거 같고. 다른 사업을 했을 수도 있을 거 같고. 그런데 오히려 해고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싸우게 된 점도 있네요.” (최진석)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전민관

“거기에 정착해서 일을 계속했겠죠. 노조가 생겼다는 게 그렇게 큰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걸 인정 못하고 해고한 거니까 이 지경이 된 거고. 노조만 인정했어도 지금 이 상태는 아니었겠죠. 노조 활동을 통해서 개선되는 점이 있었다면 저도 그곳에서 만족하고 공장에 애착도 더 가졌을 거 같아요. 일하는 사람이 직장에 애착을 갖는다는 게, 그게 장기적으로 회사에도 득이 되는 거 아닌가요.” (전민관)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남기웅

“법적공방 때문에 아사히글라스가 쓴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 구미시에서 특혜 받고 입주한 기업인데 결국 그 특혜를 불법에 쓴 거 아닙니까. 화가 나요. 노조 인정하고 해고 안 했다면, 나도 보통 사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결혼도 하고 안정되게 살았을 거예요. 해고 생활하는 동안 시간이 너무 많이 가 버렸어요. 해고 상태에서 결혼 생각은 못 하니까. 30대에 해고됐는데 이제 40대가 됐어요. 하지만 해고 후 노조활동하며 배운 것들이 많아서, 거기에 비해 예전의 삶을 생각하면 또 특별할 것은 없었을 거 같아요.” (남기웅)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노조 결성 당시엔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해고가 안 됐으면 보통 노동조합처럼 우리끼리 지지고 볶으면서, 임금 인상도 하고, 근로조건 개선도 하고. 개별로 동호회 활동도 좀 할 수 있었을 거 같고. 산에 가고 족구도 하고. 그래도 지금처럼 전국의 다른 많은 노동자를 만나거나, 오래 투쟁을 하면서 겪은 일들은 못 겪었겠죠.” (차헌호)

안진석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조합원 138명으로 시작한 투쟁이 50명으로, 급기야 22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보통내기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뜻일 거다. 험난한 시간을 함께 견뎌냈고, 그 결실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는 순간. 안진석은 지금이 오히려 조심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안진석

“대기업 정규직이 아닌 다음에야 어딜 가도 비슷한 조건에 비슷한 대우를 받았겠죠. 어딜 가나 힘들었을 거란 말이고. 그래서 해고 때문에 잃어버린 삶이라는 게 일, 집, 일, 집 하는 삶인데 그 삶을 잃었다는 것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 삶이 지금보다 특별히 더 행복했을 거 같진 않아요.···어찌 보면 지금까지와 다른 국면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위험한 순간인 거 같아요. 예전에 우리는 벼랑 끝에 있었고, 빼앗길 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검찰청 로비 점거도 그래서 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지금은 투쟁으로 돌파해서 성과를 만들어냈어요. 이 변화 때문에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해봤습니다. 자본은 우리가 손에 쥔 걸 차츰차츰 뺏어가려고 할 거예요. 우리 노동조합의 정신을 훼손하려 할 거예요. 그럴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풀어지면 안 돼요. 피로도가 쌓였지만, 지금 더 조직을 세심하게 살피고 자신도 살펴야 합니다.” (안진석)

오수일은 투쟁하며 겪은 새로운 것들이 벅차면서도, 가정에 돌아오면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내가 건강이 나쁜 것도 다 본인 탓으로 여긴다. 만약 회사가 해고하지 않았다면, 노동조합을 인정했다면, 해고 직전 사둔 자동차로 가족들과 더욱 돈독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척박한 시간 동안 분명히 얻은 것이 있고, 분명히 잃은 것도 있다. 오수일은 옆에 앉은 동지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노조 활동하기 전, 생기 없는 얼굴이 많이도 변했다. 여전히 결과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가 비할 데 없이 가치 있는 걸 얻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잃어버린 것 또한 앞으로 갚아나갈 것이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가족 입장에서 보면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선택을 밀어붙인 것이죠. 저와 가족은 전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됐어요.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도 충분히 챙기지 못했어요. 내가 투쟁함으로써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 많기도 하죠. 같이 고민해주고, 같이 싸워준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내 선택 때문에 이 상황에 놓인 가족이 있는 거죠. 잃은 시간이 있고, 얻은 사람이 있어요. 그 잃어버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그리고 공장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연대를 나눠준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들을 닮아 같이 싸울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들에게 받은 것이 너무 커서 걱정도 되지만, 할 겁니다.” (오수일)

▲2016년 2월 12일 아사히글라스 공장 입구 사진.

[편집자 주] 올해로 9년째다. 2015년 7월 아사히글라스 하청노동자들 178명이 전원 해고됐다. 22명의 노동자들은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며 9년째 공장 앞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1, 2심 법원도 아사히글라스가 해고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자 직접 고용을 거부하면서 노동자에게 배상해야 할 임금, 이자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약 90억 원이다. 노동자들과 아사히글라스가 서로 제기했던 민사소송은 6건이고, 파견법 위반으로 진행 중인 재판도 있다. 아사히글라스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과 법무법인 태평양에 사건을 맡겼다. 법조계에 따르면 소송 대리 비용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사히글라스는 노동자들의 해고 이후 정문 앞 경비 강화에도 비용을 더 투입했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법률 대응으로 아사히글라스가 9년 동안 쓴 돈은 100억을 훌쩍 넘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설립, 해고를 겪으며 다방면으로 투쟁에 나섰다. 법원을 출입하는 일도 잦아졌다. 9년 동안 26건의 다양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소송비용으로만 1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 법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질문을 수없이 했다. 30대 초반의 노동자는 40대가 됐고, 40대 중반 노동자는 50대가 됐다. 만약,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조합을 인정했더라면 9년째 거리에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뉴스민>은 노동조합을 만나 삶이 바뀐 해고노동자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노동자에게 취약한 법과 제도까지 짚어 본다.

취재=박중엽, 김보현 기자
기사=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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