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5) 위로금 거절하고 남은 22명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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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5) 위로금 거절하고 남은 22명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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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공단은 산업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화도 심화했다. 아사히글라스의 사례처럼 기존에는 정규직이 하던 업무가 외형상 사내하도급의 형태로 전환되는 방식이 확인된다. 또, 구미 공단의 산업 재편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아사히글라스 차원의 구조조정도 진행됐다.

구미에서는 1960년대부터 전자공업과 섬유산업이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전자공업은 LG(당시 금성)와 삼성, 대우를 필두로, 섬유산업은 제일합섬, 코오롱 등 굵직한 기업이 규모를 키웠다. 노동 집약 산업인 섬유산업은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가 비교우위에 있었고, 점차 쇠퇴했다. 2000년대 들어 구미는 전자공업이 치중하던 디스플레이 산업 또한 쇠퇴했고, 모바일 산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아사히글라스 공장으로 들어서는 삼거리에는 해고자들의 농성장이 있다. 9년 세월 동안 부서지고 다시 서기를 반복한 농성장은 해고자들의 모습을 닮아 있다. 주간 근무조 퇴근 시간 무렵, 어두워지는 겨울 한기가 농성장을 휘감는다. 농성장 안으로부터 전등 빛 한줄기가 흘러나온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대화 소리, 저녁으로 먹을 떡국 냄새도 흘러나온다. 1월 18일, 설을 앞둔 저녁 문화제에 앞서 해고자들이 한데 모였다.

해고자 신분으로 맞이하는 8번째 설날. 부당해고 투쟁이 길어지며 오수일은 본가에 발길을 끊었다. 둘러앉은 조합원들의 모습도 오수일과 다를 바 없다. 이제는 농성장에서 동료 얼굴을 보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다. 이 자리에서 화두는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형사사건을 맡은 김앤장이다. 일주일 전인 1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형사사건 2심 결심 공판을 방청한 조합원들은 김앤장 변호사의 최후변론에 혀를 내둘렀다. 변호사는 지난 7년이 회사에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지난 7년은 저희 회사에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재판부에 간절한 호소를, 읍소를 드립니다. 일본 회사가 설립한 회사라서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용을 창출하고도 사법적 사건에서 국내 회사보다 불이익을 받은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선입견 없는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앙망드립니다.···파견법은 IMF 상황에서 일부 업종에 파견을 허용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법의 취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재판부가 파견관계를 인정하면 도급회사는 근로자를 모두 고용하고 정년까지 보장해야 하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중대한 상황입니다···”

당시 공판에 참석했던 오수일은 단박에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힘든 시간이었다고. 그렇다면 그건 누구 잘못인가. 애초에 노조만 인정했어도, 이렇게 해고시키지만 않았어도 벌어질 일이 아니었는데. 갈등도 없었을 것이고, 저 앞에 앉은 변호사에게 엄청난 수임료를 낼 일도 없었을 텐데. 누가 자초한 일인가. 누구 탓이란 말인가···

민사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도 1, 2심 모두 승소했고, 형사인 파견법 위반 사건도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상황. 오수일은 해고자들의 투쟁이 승리를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간다고 느낀다. 그래서일까. 한때, 승소 가능성을 낮게 점쳐서인지 회사 측이 해고자들에게 접선을 타진한 적 있다. 그때 차헌호와 오수일은 해고자 대표로 회사와 만났다. 처음은 법률대리인들과 만났고, 그다음은 회사 관리자도 참석한 자리였다. 회사는 이들에게 조건부로 복직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차헌호를 빼고 복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복직 대신 위로금을 원한다면 큰 금액을 지급하겠다고도 했다.

오수일이 물었다. “22명은 안 된다는 거네요?”
차헌호도 물었다. “나만 빼면 된다는 말입니까?”
“···”

오수일은 뒤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조합원들끼리 합의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이란, 첫 번째로 22명 전원 복직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 복직 후 노조활동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결과는 결국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많은 것을 타협해야 하고, 그렇다면 투쟁의 성과로 쟁취할 ‘노조할 권리’ 또한 불확실한 상황에 놓일 것이 자명했다. 오수일과 차헌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훗날, 해고자들은 타협이 아닌 정당한 권리를 법원에서 인정받아, 회사로부터 미지급 임금 64억 원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이끌어냈다. 원칙을 고수한 결과다.

결국 해고의 부당함이 인정되리라 믿는다. 이를 위해 보낸 7년의 세월을 되짚어보면, 그 시간이 승리를 향해 가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마냥 기쁨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해고자들은 ‘만약 아사히글라스가 애당초 여느 회사처럼 노조를 인정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물음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더 나아가 불법파견을 해소하고 정규직으로 고용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가정해보는 것은 덧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쟁을 위해 담보건 것이 그만큼 크기에 불가피한 상념이기도 하다.

천막에 둘러앉은 해고자들이 저마다 상념을 꺼내 본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김정태 조합원

“회사 다니면서 노조 활동을 한다면 그 나름으로 배워나가는 게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평범한 조합원으로서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했을 거 같아요. 20대에는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도 없어졌어요. 그보다 노조하면서 배운 게 많아요. 나만 부당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지금 와서 아쉬운 게 없고, 다시 돌아가도 노조 활동을 했을 거 같아요.” (김정태)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송동주

“그 상황에 안주하면서 살았을 거 같아요. 취미생활도 많이 했을 거 같은데, 낚시를 좋아하니까요. 지금 여자친구 만나고 있거든요. 해고되고 여자친구를 만났다. 만약에 해고가 안 됐으면 못 만났겠죠. 집회 때 알게 됐기 때문에…지금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 같고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송동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박성철

“예전에는 50 넘어가면 자유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해고되고 나서 회사가 돈 받고 나가라고 했을 때, 고민했어요. 서류를 집에 보내서 집사람이 그걸 봤는데, 어쩌고싶냐더라고요. 끝을 보고 싶다고, 현장에 돌아 가보고 싶다고 했어요. 집사람이 투잡하고 있을 때거든요. 일단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고맙죠. 미안하고. 그런데 이제 한계를 향해 가는 거 같아요.” (박성철)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장명주

“해고 안 됐으면 안에서 노조 활동을 잘 했겠죠. 사람들과도 더 친해졌을 거고. 휴게시간, 밥먹는 시간, 작업복 문제 많은데 이걸 개선했을 거 같고, 좋은 환경에서 일했을 거 같아요. 사내에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동호회가 특별히 없었거든요. 동호회 활동도 해서 좀더 윤택하게 지냈을 거 같네요.” (장명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김태우

“가족들과 놀러도 많이 다니고, 여행도 다녔겠죠. 사실 여행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옆에서 자꾸 가자고 해서요. 지금은 못 가죠. 아이들도 못 챙겨주고. 해고 됐을 때 학생이었는데, 내가 바깥으로 많이 다니니까 신경을 못 썼어요. 정말 미안했죠. 그래도 지금은 이해해주고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김태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민동기

“가족과 갈등이 제일 아쉽죠. 부모님은 여전히 데모하는 걸 못받아들이세요. 친구들과 관계도 소원해졌고, 결혼 생각도 안 하게 됐어요. 예전에 나는 융합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노조하면서 많이 고치려 했고 차헌호 지회장을 만나며 인생도 많이 변했어요.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걸 배웠고. 해고가 안 됐다면, 그 상황에서도 다른 배울 게 있었겠죠.” (민동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이영민

“어머니가 여기저기 안 좋으신데, 병원에도 제대로 못 모시고 있어요. 84세이신데, 그게 제일 미안하죠. 생활이 어려우니까. 안정적이었다면 좀더 어머니께도 가정에도 잘 했을 건데. 친구들과 농지생활을 같이 하자고 얘기도 했었는데, 안정적이었다면 그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밖에 나와서 배운 게 너무 많아서, 그래서 아쉬움은 없습니다.” (이영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허상원

“잃은 게 많아요. 가족 관계도 소원해지고 신뢰도 떨어졌고. 아이들 돌봄을 못했어요. 아침에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일상이 반복됐고, 부인에게도 인정을 못 받고. 친구나 친척들과도 거리를 두게 되고요. 그런데 그만큼 생각이 덜 바뀌긴 했을 거예요. 해고 생활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알게 됐거든요. 안정적으로 살았다면 세상 살기 쉽게 생각했을 거예요.” (허상원)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김성한

“결혼 12년차라 가족사진도 찍고 하려 했는데, 형편이 안 돼서 못찍었어요. 수입이 한정적이잖아요. 미안하죠. 아이들이 아빠, 엄마 찾을 나이인데, 관심을 못 주니 미안합니다. 어른들에게도 죄송스럽고. 처갓집에 한 달에 두 번 이상 찾아갔는데 투쟁하고 1년 지나니 가기가 어렵더라고요. 주눅도 들고. 집안싸움도 생기고.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거니까. 억울하잖아요.”(김성한)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남달

“해고 뒤 가족들과 여행을 못 다녔어요. 해고만 안 됐어도 가족과 추억을 많이 만들었겠죠. 집에서 빨리 그만두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같이 놀러 가겠어요. 비정규직 삶이 나아진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네요. 그래도 노조 활동을 꾸준히 했으면 많이 나아졌을 거예요. 그걸 못 봐서 아쉬워요.” (조남달)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임종섭

“오리온전기에서 정규직의 삶을 살아봤어요. 비정규직은 기를 못 펴요. 아사히글라스에서는 전화도 마음 놓고 한 통 못했어요. 월차를 쓰려 해도 며칠 전에 예약하고 대체할 사람을 구해야 겨우 가능했어요. 해고되고 가정에서도 많이 다퉜는데, 아무래도 가정은 지금보다 나았겠죠. 집안도 더 화목했을 거고요. 검찰이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지. 처음에는 1년, 2년 세다가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날짜를 안 세게 됐어요. 그러면 침울해 지거든요.” (임종섭)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황태섭

“살기 좋았겠죠. 결혼도 했을 거 같고. 직장을 안 다니고 생계 나가서 일은 하고 있지만, 안정적이지 않으니까 결혼은 생각하기 어렵죠. 나이는 계속 들어가고. 그래도 이렇게 길거리에 안 나와봤으면 내 삶을 돌아보고 또 노동자 삶을 알아갈 기회는 없었을 거예요. 다른 곳에 비정규직으로 또 가더라도 잘리고 옮기고 하는 삶이었겠죠. 노조가 희망처럼 느껴졌는데, 그래도 9년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회사도 우리가 이만큼 할 거라 생각 못했겠죠. 서로 처음 있는 일이에요.” (황태섭)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박세정

“노조는 이 회사가 오래 다닐 수 있는 회사가 됐으면 해서 시작했어요. 아니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겠죠. 특별한 욕심도 없이 전처럼 살았겠죠. 그런데 활동하다 보니 자꾸 자존심이 상하고,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사하는 걸 보면, 세상 모든 게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힘이 있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같이 연대해서 질기게 싸우는 수밖에 없지요.” (박세정)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한상기

“순리대로 됐다면 그건 천국이겠죠. 지금은 돈이 없어서 아이들과 어디 놀러도 못 가고 해주는 것도 없어요. 배우자에게 제일 미안하고. 같이 돈 벌어야 하니까요. 안정적이었다면 여행도 같이 많이 다녔을 거고. 저는 비정규직을 많이 겪어본 사람으로서 어려운 다른 비정규직을 도왔을 거 같기도 해요. 지금 상황이 부당한 건 회사도 알겠죠. 우리가 약하니까 눈 감고 있는 거겠죠. 대가를 다 받아낼 거예요. 복직하고나서 그 후에도 뭉쳐서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잘 해나갈 거예요.” (한상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이민우

“그냥 이렇게 해고 안 했으면 많이 달랐겠죠. 급여도 지금쯤 올랐을 거고, 나는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았을 거고. 저는 옷도 좋아하고, 목공이나 공방에도 관심 있거든요. 그런 걸 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어쩌다보니 해고되고나서 목공은 할 수 있게 됐네요. 천막 부서지고 새로 짓고 많이 했거든요. 약자란 게 아프고 힘들고 돈 없고 부실한 거잖아요. 약자는 약자라는 이유로 기회가 없어요. 억울한 일 있어도 경찰서에 갈 수 있겠어요? 참고 사는 거지. 그런데 노조 하면서, 사람이 가진 게 없으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민우)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권재덕

“애들 둘이 대학생인데, 등록금 문제가 있어요. 학비 때문에 단기 대출을 받아서 겨우 메우고 있어요. 현금서비스를 받거나 일하는 곳에서 미리 퇴직금을 정산해서 막기도 하고요. 지금보다 나았겠죠. 상식적인 목소리를 인정받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그동안 버틸 수가 없어서 지금은 다른 일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일마저 불법 사내하도급이죠.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권재덕)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최진석

“오래 다니는 직장이 됐을 거 같기도 하고. 워낙 한 군데 못 있는 성격이라 다니다가 중간에 나오게 됐을 수도 있을 거 같고. 다른 사업을 했을 수도 있을 거 같고. 그런데 오히려 해고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싸우게 된 점도 있네요.” (최진석)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전민관

“거기에 정착해서 일을 계속했겠죠. 노조가 생겼다는 게 그렇게 큰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걸 인정 못하고 해고한 거니까 이 지경이 된 거고. 노조만 인정했어도 지금 이 상태는 아니었겠죠. 노조 활동을 통해서 개선되는 점이 있었다면 저도 그곳에서 만족하고 공장에 애착도 더 가졌을 거 같아요. 일하는 사람이 직장에 애착을 갖는다는 게, 그게 장기적으로 회사에도 득이 되는 거 아닌가요.” (전민관)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남기웅

“법적공방 때문에 아사히글라스가 쓴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 구미시에서 특혜 받고 입주한 기업인데 결국 그 특혜를 불법에 쓴 거 아닙니까. 화가 나요. 노조 인정하고 해고 안 했다면, 나도 보통 사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결혼도 하고 안정되게 살았을 거예요. 해고 생활하는 동안 시간이 너무 많이 가 버렸어요. 해고 상태에서 결혼 생각은 못 하니까. 30대에 해고됐는데 이제 40대가 됐어요. 하지만 해고 후 노조활동하며 배운 것들이 많아서, 거기에 비해 예전의 삶을 생각하면 또 특별할 것은 없었을 거 같아요.” (남기웅)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노조 결성 당시엔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해고가 안 됐으면 보통 노동조합처럼 우리끼리 지지고 볶으면서, 임금 인상도 하고, 근로조건 개선도 하고. 개별로 동호회 활동도 좀 할 수 있었을 거 같고. 산에 가고 족구도 하고. 그래도 지금처럼 전국의 다른 많은 노동자를 만나거나, 오래 투쟁을 하면서 겪은 일들은 못 겪었겠죠.” (차헌호)

안진석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조합원 138명으로 시작한 투쟁이 50명으로, 급기야 22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보통내기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뜻일 거다. 험난한 시간을 함께 견뎌냈고, 그 결실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는 순간. 안진석은 지금이 오히려 조심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안진석

“대기업 정규직이 아닌 다음에야 어딜 가도 비슷한 조건에 비슷한 대우를 받았겠죠. 어딜 가나 힘들었을 거란 말이고. 그래서 해고 때문에 잃어버린 삶이라는 게 일, 집, 일, 집 하는 삶인데 그 삶을 잃었다는 것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 삶이 지금보다 특별히 더 행복했을 거 같진 않아요.···어찌 보면 지금까지와 다른 국면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위험한 순간인 거 같아요. 예전에 우리는 벼랑 끝에 있었고, 빼앗길 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검찰청 로비 점거도 그래서 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지금은 투쟁으로 돌파해서 성과를 만들어냈어요. 이 변화 때문에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해봤습니다. 자본은 우리가 손에 쥔 걸 차츰차츰 뺏어가려고 할 거예요. 우리 노동조합의 정신을 훼손하려 할 거예요. 그럴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풀어지면 안 돼요. 피로도가 쌓였지만, 지금 더 조직을 세심하게 살피고 자신도 살펴야 합니다.” (안진석)

오수일은 투쟁하며 겪은 새로운 것들이 벅차면서도, 가정에 돌아오면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내가 건강이 나쁜 것도 다 본인 탓으로 여긴다. 만약 회사가 해고하지 않았다면, 노동조합을 인정했다면, 해고 직전 사둔 자동차로 가족들과 더욱 돈독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척박한 시간 동안 분명히 얻은 것이 있고, 분명히 잃은 것도 있다. 오수일은 옆에 앉은 동지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노조 활동하기 전, 생기 없는 얼굴이 많이도 변했다. 여전히 결과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가 비할 데 없이 가치 있는 걸 얻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잃어버린 것 또한 앞으로 갚아나갈 것이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가족 입장에서 보면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선택을 밀어붙인 것이죠. 저와 가족은 전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됐어요.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도 충분히 챙기지 못했어요. 내가 투쟁함으로써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 많기도 하죠. 같이 고민해주고, 같이 싸워준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내 선택 때문에 이 상황에 놓인 가족이 있는 거죠. 잃은 시간이 있고, 얻은 사람이 있어요. 그 잃어버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그리고 공장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연대를 나눠준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들을 닮아 같이 싸울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들에게 받은 것이 너무 커서 걱정도 되지만, 할 겁니다.” (오수일)

▲2016년 2월 12일 아사히글라스 공장 입구 사진.

[편집자 주] 올해로 9년째다. 2015년 7월 아사히글라스 하청노동자들 178명이 전원 해고됐다. 22명의 노동자들은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며 9년째 공장 앞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1, 2심 법원도 아사히글라스가 해고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자 직접 고용을 거부하면서 노동자에게 배상해야 할 임금, 이자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약 90억 원이다. 노동자들과 아사히글라스가 서로 제기했던 민사소송은 6건이고, 파견법 위반으로 진행 중인 재판도 있다. 아사히글라스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과 법무법인 태평양에 사건을 맡겼다. 법조계에 따르면 소송 대리 비용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사히글라스는 노동자들의 해고 이후 정문 앞 경비 강화에도 비용을 더 투입했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법률 대응으로 아사히글라스가 9년 동안 쓴 돈은 100억을 훌쩍 넘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설립, 해고를 겪으며 다방면으로 투쟁에 나섰다. 법원을 출입하는 일도 잦아졌다. 9년 동안 26건의 다양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소송비용으로만 1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 법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질문을 수없이 했다. 30대 초반의 노동자는 40대가 됐고, 40대 중반 노동자는 50대가 됐다. 만약,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조합을 인정했더라면 9년째 거리에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뉴스민>은 노동조합을 만나 삶이 바뀐 해고노동자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노동자에게 취약한 법과 제도까지 짚어 본다.

취재=박중엽, 김보현 기자
기사=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