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 오전 10시경, 심춘숙(79) 씨는 시장에 가려 버스를 타면서 습관처럼 1,300원을 준비했다가 요금통이 없는 걸 보고 ‘아차’ 했다. 심 씨는 “세상 어디에 이런 곳이 있나”며 “예전엔 나온 김에 시장 들렀다 병원까지 가려면 진보에서 버스 갈아타야 해서 버스비가 5,200원씩 들었다”고 말했다. 병원, 시장, 목욕탕은 심 씨를 비롯해 청송군 무료버스를 타는 노인들의 주된 목적지다.
사라진 요금함, 1월 1일부터 누구나 무료로
버스정류장 가득 채운 여성 노인들
운전 못 하는 여성들이 주된 수혜자
버스 기사는 안전 더 챙기고, 수입도 안정화
18일 오전, 버스는 심 씨와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로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 무릎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버스에 올라서는 노인들은 이제는 사라진 요금통 자리를 힐끗 쳐다봤다. 경북 청송군은 올해 1월 1일부터 시내버스를 전면 무료화했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버스 이용자는 노인, 그중에서 심 씨와 같은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오전 9시 30분부터 청송버스터미널에서 진보터미널까지, 진보터미널에서 괴정리까지 약 1시간 30분 동안 버스가 왕복하는 동안 타고 내린 50여 명 중 60~70대 남성은 4명에 불과했다.
진보시장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려 빼곡하게 정류장을 채운 사람들도 모두 여성들이었다. ‘왜 할아버지는 안 보이고, 할머니들만 버스를 타느냐’는 물음에 누군가 “할아버지들은 벌써 저리로 갔지”라며 머리 위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함께 있던 일행들이 “맞다”며 웃었다. 괴정리에서 탑승한 70대 여성은 “농사짓는 집에는 집집마다 차는 있다. 남자들이나 자식들은 운전할 줄 아니까 차를 타고 다닌다. 버스 타는 건 나랑 비슷한 할매들”이라며 “각자 볼일 있는데 차를 태워 달라고 어떻게 이야길 하나. 서로 불편만 하다”고 말했다.
관2리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에 오른 ‘동네친구들’ 임상춘(81), 김갑출(70), 김명자(71) 씨도 운전을 할 줄 모른다. 이들에겐 버스가 자가용이나 마찬가지다. 김갑출 씨는 “차 없고 면허증 없으면 다 버스 타지”라고 말했고, 김명자 씨도 “택시는 또 비싸다. 될 수 있으면 버스를 탄다. 마을에도 대부분 사람들이 나이가 많으니까, 버스 타는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70대 위로 다 할매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렇게 장 보러도 가고 목욕탕도 가고, 병원도 가고 그런다”며 무료버스를 도입한 청송군에 고마움을 전했다.
청송군이 지난해 10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운행 버스 17대의 첫차와 막차까지 전수조사한 결과도 버스 이용자 절대다수는 노인이었다. 이 기간 이용자 3,980명 중 65세 이상이 2,910명으로 73.1%였다. 청송은 버스카드단말기가 없어 환승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탓에 심 씨처럼 환승을 하면 버스비가 곱절로 들어간다. 군에선 단말기를 설치하려고도 해봤지만, 단말기 회사는 청송만으론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며 난색을 표했다.
청송군은 65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무료서비스 정책 도입도 검토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버스회사의 평균 수익금을 검토하고, 전면 무료화로 정책을 전환했다. 버스회사에 지급해야 할 보전금이 3~4억 수준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단말기 설치 비용이 2억여 원인 것과 비교하면, 비용 대비 효과가 나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버스회사와 기사들 입장에서도 무료버스는 좋은 제안이었다. 이전에도 70%는 지자체 보조를 받으며 운영되던 상황이었다. 박현식 청송버스 대표는 “코로나 이전 1,300~1,400명이던 하루 이용객은 코로나 이후 40% 줄어 타격이 컸다. 이달 기준으로 보면 코로나 팬더믹 이전으로 거의 회복했다”며 “저희 입장에서도 수익이 안정적으로 확보돼 괜찮은 제안이었다. 직접 보셨듯 버스 이용객 대다수가 노령층이고, 이분들에게 중요 교통수단”이라고 강조했다.
16년 경력의 버스기사 최기열 씨는 “버스비를 안 챙겨도 되니 여유가 생기는 건, 운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안전 운행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며 “그전에는 잔돈도 거슬러 줘야 하고, 손님들도 돈을 내려고 왔다갔다 하면 사고가 날까 걱정이 많이 됐다. 요금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했다. 무료버스는 기사들에게도 승객 안전을 챙길 여유를 더 주는 셈이다.
청송 시내버스는 총 18대(예비 1대 포함)가 63개 노선으로 청송 곳곳을 누빈다. 주요 노선은 ▲청송·약수탕·주왕산 ▲진보↔괴정1.2 ▲진보↔교정A ▲진보↔추현·기곡·부곡 ▲진보↔지동 ▲진보↔세장 ▲진보↔교동이다. 도로 폭이 좁아 버스가 다니지 못하는 80여 개 마을에는 천원택시가 버스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교통약자들에게 제공된다.
군민들 잘 이용해 뿌듯해
주변 지역에서 부러운 눈길도, 확대 가능성 기대
‘청송무료버스 조력자’들은 노령인구가 많은 청송과 조건이 비슷한 인근 기초지자체로 무료버스 정책이 퍼져나가길 기대했다. 지난해 기준 청송 인구 2만 4,295명 중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9,815명, 40.4%다. 여성이 5,585명, 남성은 4,230명이다. 지방소멸위험지역 상위 6번째를 차지할 만큼 고령인구 바율이 높다. 인근 지자체도 처지는 비슷하다. 인근 의성의 65세 이상 노인 비율은 44.2%, 군위 43.1%, 영덕 40.4%, 영양 39.9%다.
김태규 청송군 안전정책과장은 “보건복지부, 선관위, 인구감소지역지원특별법 등 여러 법리 검토가 있었다. 실무자 입장에서도 군민들이 잘 이용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뿌듯하다”며 “청송과 비슷한 상황의 경북 기초자치단체에서 정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생활권이 겹치는 주변 지역에서 우리 무료버스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동섭 청송버스 노동조합장은 “버스 운전을 하면서 요금을 안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실제로 버스를 편하게 이용하시는 분들도 더 늘었다”며 “생활권이 겹치는 지역주민들도 기회가 되면 이용하고, 동료 기사들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더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인근지역 버스노조합장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청송무료버스가 화젯거리”라며 “주민들 반응도 좋고, 청송과 비슷한 상황들이니 조만간 주변 지역에 무료버스가 더 늘어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청송엔 노령인구가 많다. 복지와 인구소멸지역으로서 우리 지역 상황을 고려해 대한민국 최초로 무료버스를 운영하게 됐다. 어르신들이 자주 나와서 활동하시면 좋겠다”며 “경제 활성화 등 파생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청송에 놀러 오시면 차를 대놓고, 버스를 타고 곳곳을 다니며 ‘탄소중립’ 관광을 해보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은미 기자
jem@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