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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인즈주의 정책에 힘입은 로컬영화 탄생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온 세상이 얼어붙었던 얼마 전, 사회 각 분야 힘들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어디 하소연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게 문화예술분야다. 다중이 한데 모여 공연이나 상영을 관람하는 게 본령이다 보니 순식간에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획해온 행사들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이벤트뿐 아니라 이들이 몸담던 각종 교육조차 특성상 진행되기 어렵다보니 당시 급성장하던 배달 플랫폼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고를 견딘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나올 정도였다.
정부기관 중 영화정책을 담당하는 문체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가 이런 상황에서 2020-2021년, 2년에 걸쳐 ‘일자리 연계 온라인·뉴미디어 영상콘텐츠 제작지원’이란 사업명으로 지원정책을 실시한다. 대개 제작지원사업은 순수 제작관련 경비 위주로 집행되던 것에서 탈피해 창작자 인건비 항목이 반영된 게 특징이다. 10분 내외 단편영화를 330편을 공모받아 관련 경비를 지원하는 본 사업 덕분에 코로나19가 세상을 뒤집어놓던 시절에 오히려 독립단편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진풍경이 발생했다. 물론 그중에는 졸속인 것들도 일부 있지만, 형편상 작업이 중단되었거나 시작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던 기획이 빛을 본 것도 적지 않았다. 이후 몇 년간 해당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독립영화가 전국 영화제와 상영회에서 속속 성과를 드러내는 중이다.
해당 지원사업은 철저히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산물이다. 자주 인용되는 케인즈 경제학의 금언 그대로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낡은 병에 돈을 가득 채워 넣은 후 그것을 어느 폐광에다 묻어두고는, 기업들에게 마음대로 그 돈을 파 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부터는 모두 그 돈을 파내기에 혈안이 될 터이므로 실업이 줄어들고, 실질소득과 부도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보다는 그 돈으로 주택을 짓거나 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렇지만 최소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황 때문에 못살겠다는 독립영화인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대책을 제공하는 동시에 ‘영화산업’ 인력풀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시행된 본 사업은 의도치 않은 긍정 효과를 창출한다. 돈을 주긴 줘야 하는데 그냥 지원하기 뭣하니 영화 1편 만들어내라는 조건에 부응하는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행해졌다. 말 그대로 케인즈 경제학의 증명사례 격이다. 특히 신예 영화인이나 지역독립영화에는 단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해당 사업은 2년간 7편 이상의 대구지역 독립영화 목록을 추가시킨바, 일정한 평가와 영화제 진출이라는 성과를 획득한 장주선 감독의 <프리즈마>는 그 대표적인 결실이다.
◆ 역병의 시절, 일자리를 구하려는 주인공의 하루
회사 면접장 바깥 복도에서 7살 채희가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과 즐겁게 자기가 그린 그림자랑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2번 면접자인) 민애가 면접을 마치고 나온다. 민애는 채희의 엄마다. 채희와 놀아주던 여성은 면접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던 것.(즉 민애와 그 여성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이다) 그래서일까? 민애는 채희에게 아무에게나 말 섞지 말라며 쌀쌀맞게 당부한다. 둘은 손을 잡고 면접장을 벗어난다. 그 뒤에선 아까 그 여성이 면접장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민애는 다니던 직장 때문에 수도권에서 몇 년 전 대구로 어린 딸과 단둘이 내려와 있다. (남편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회사 형편이 어려워진 바람에 기약도 없는 무급휴직 중이다. 사실상 실업자와 다를 바 없는 상태다. 싱글 맘이다 보니 생계가 막막하지만, 일자리 구하기란 (동시대를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인지하듯이)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민애는 직업소개소를 찾아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본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휴직 상태라 4대 보험에 가입하면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채희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야근이나 휴일근무를 피하려다 보니 민애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통 나오지 않는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상황이다 보니 점점 더 민애는 지치고 조급해진다.
모녀는 어렵게 구한 다음 면접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채희가 육교 위에서 색연필을 쏟는다. 안그래도 늦을까봐 마음 급한 민애는 새로 사주겠다며 그냥 버리라고 색연필을 주섬주섬 챙기는 채희를 재촉한다. 다그치는 엄마에게 딸은 투정을 부리고 짜증이 폭발한 민애는 채희에게 역정을 낸다. 그렇게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채 해가 저문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철역에 온 모녀는 지친 채로 열차를 기다린다.
◆ 영화가 보여주는 소수자의 시선 속 대구
<프리즈마>는 코로나 시대 싱글 맘과 어린 자녀로 구성된 2인가족의 고단한 하루 풍경을 10분여라는 짧은 시간 동안 풍경화처럼 묘사한다. 영화를 통해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 같은 가난의 고통과 그로 인한 가족의 수난사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발단은 주인공 가족의 실업이고, 전개 과정의 갈등 역시 수입이 떨어진 가족의 빈곤이 주 원인이다. 게다가 주인공 가족은 흔히 우리가 규정하는 ‘정상가족’과 한참 거리가 먼 형태다. 남성 가장은 부재하고 외벌이를 하던 민애는 연고도 없는 낯선 지역에서 실업자 신세다.
언제나 위기나 재난은 그 이전 무난하던 시기에도 어렵던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심각한 피해를 강요한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어린 딸의 삶이 무너질 위기다. 그 앞에서 민애는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심리상황 때문에 (면접장에서 딸과 놀아주던 경쟁자를 향하듯) 타인의 호의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조급함과 불안감은 주인공의 내면에서 건드리면 터질 듯 심화 일로다.
민애는 그런 와중에도 딸 채희만은 지키고 싶다. 자신은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도 채희가 좋아하는 미술학원은 계속 보내려 다짐한다. 하지만 (대구 사투리 걸쭉하게 구사하는) 직업소개소장은 우리가 빈곤에 대해 가지는 전형적인 사회적 편견을 민애에게 던진다. 형편도 안 되면서 입시에 도움도 당장 안 될 미술학원 보내는 건 욕심이자 사치 아니냐고, 포기할 건 포기하라고 소장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너무나 가볍게 툭 던진다. 민애는 소장에게 ‘을’의 처지인지라 속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자존심을 삭인다. 하지만 토해내지 못한 응어리는 꾹꾹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심리상태다 보니 민애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는 원동력인) 채희에게까지 그만 상처를 주고 만다. 색연필 사건에서 유독 민애가 역정을 내는 건 그녀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앞부분에서 이미 암시된바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화방을 지나던 채희는 할인판매 표식이 붙은 색연필이 자기 것과 같다고 엄마에게 말하지만 민애는 얼른 그 자리를 뜨려 한다. 좋은 것만 아이에게 해주고픈 민애로서는 딸에게 사준 색연필이 고급이 아니라 할인품목이란 걸 들키기 싫었을 법하다. 형편 안 되면 분수를 알고 아껴 살아야한다는 소개소장의 지나가는 한마디는 언뜻 틀린 구석 없어 보인다. 하지만 채희를 미술학원에 보내는 건 민애가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하는 이유이자 동력으로서의 최저선이다. 그걸 포기하라고 하면 민애는 삶의 의지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단지 ‘실용’을 넘어서는 존엄성 문제가 불거진다.
주인공은 지역연고도, 특별한 전문기술도 없다. 어린 자녀가 딸렸기에 야근도 휴일근무도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정상적인 고용형태를 피해야 하는 근무조건까지 지녔다. 최악의 3박자다. 좋지 않은 일자리라도 양적으론 적지 않은 수도권과 비교하면 그런 민애가 견뎌야 할 대구라는 공간은 넘어설 수 없는 절벽, 혹은 유배지의 절망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 속 익숙한 장소들이 등장할 때마다 서울말씨를 구사하는 민애의 고립감은 보는 이들에게 더욱더 증폭된다. 그저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명덕네거리, 대구역 부근, 3호선 달성공원역의 인상이 (여름 배경인데도) 무척이나 황량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해내는 연출과 배우들의 조화
하필 영화 속 시공간이 불볕더위로 명성(!?)을 떨치는 대구의 여름이다 보니 주인공의 절박함은 한층 더 무겁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거기에다 주요 상황설정은 구직활동이다. 직장인이 월급이 끊기면 3개월에서 6개월 이내에 경제적으로 붕괴된다고 하는데 외부적 날씨와 답답한 속마음이 쌍끌이 그물처럼 주인공을 옥죄는 셈이다. 민애 역 이다영 배우의 간절한, 때론 비굴해지거나 감정을 억누르다 끝내 분출하곤 하는 연기는 그런 주인공의 막막한 심정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다.
영화 속에서 채희가 그려내는 스케치북 속에 펼쳐진 다양한 원색의 풍경은 미술학도들에겐 필수품인 명품 브랜드 색연필의 형형색색 이미지와 통한다. 하지만 정작 민애가 처한 낯선 땅의 풍경은 뜨겁고 황량한 사막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차이 나는 두 세계가 적절하게 대비를 이루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심상을 전한다. 감독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회문제를 환기하기보단 다양한 우리 주변의 삶 중 하나의 단면을 극화해 전하려 도전한다. <프리즈마>가 제시하는 ‘영화 속 현실’은 동시대를 견뎌낸 관객 각자의 현실과 겹치면서 공감대와 보편성을 획득한다.
주인공은 영화 속 하루 동안 몇 군데씩 면접장을 뛰어다니며 뭐든 시키면 할 수 있다고 호소하지만 그녀가 일자리를 얻었다는 소식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지친 모녀는 전철 플랫폼에서 찰나의 휴식을 갖는다. 그 순간 판도라의 상자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던 존재를 발견한다. 그리스 신화를 찾아보면 그 존재의 이름은 바로 ‘희망’이다. 지독히 현실적인 배경을 가진 작품이 결말에 제시하는 소박한 낙관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선사해준다. 만든 이의 의도와 결과가 적절히 조화를 이뤄 단정하게 마감해낸 정갈한 마무리는 꽤 감흥이 진하다.
<작품정보>
프리즈마 Prisma
2021|한국|드라마|12분
감독 장주선
주연 이다영(민애 역), 강혜원(채희 역)
출연 이미정(소장 역) 류한빈(하진 역)
각본/편집 장주선, PD 남가원, 촬영/조명/색보정 전상진
미술/의상 성광제, 동시녹음 김태형, 조감독 박찬우, 스크립터 손현교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뉴-쇼츠 부문 상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