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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누수가 시작된 지 이미 오래
고여 있던 당신이란 물줄기는 수시로 솟구치고
나는 기억을 수리하느라
허둥대기 일쑤입니다노래가 젖고 쓴웃음이 젖고
훔쳐보던 무당벌레 등이 다 젖었지만 젖지 않는 건
잘 마른 푸른 무청 같은 당신 웃음뿐기억은 외피가 아니라 내피여서
늘 체온이 묻어 있는 것이어서
나는 떨칠 수가 없었나 봅니다이 순간도
기억 하나를 또 쌓는 중인지도 모르지만
위로처럼 기억이란우리가 눈 시리도록 바라보았던 동백처럼
어느 순간 시들지 않고도
툭, 떨어질지도 몰라서
그렇게 맵게 피워 올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동백꽃이 툭,’ 전문
지난 26일 대구 중구 음악다방 쎄라비에서 성주문학회 회장 정동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를 겸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시집 낭독회가 열렸다. 지난 9월 ㈜천년의시작에서 펴낸 이번 시집은 표제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와 ‘동백꽃이 툭,’을 비롯한 시 53편을 4부로 나눠 실었다.
김수상 시인 사회로 열린 낭독회는 참여자들이 돌아가며 시편을 읽는 낭독회와 배창환 시인의 작가 대담, 작가 자선시 ‘후평리 1168번지 산벚나무’ 낭독 등의 순서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는 김용락, 배창환, 노태맹 시인과 성주문학회, 밀양문학회에서 참여한 문인 및 독자 약 40명이 참여했다.
저 나무가 저기 서 있게 된 까닭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 나무 아래에서 발화되는 연애사들이
피어나는 꽃만큼 흐드러지곤 했답니다그 꽃을 보고 동하지 않는 남녀가 있었다면 청춘이란 게
얼마나 한심하였겠냐고꽃그늘엔 가지 물 트는 소리 같은 것이 끊이질 않았는데
부끄러운 꽃잎들만 얼굴을 돌리기도 분분히 지기도 했답니다그 소문이 멀리 하늘에까지 전해져
별들이 내려오곤 하는데 오기까진 너무 먼 거리여서
빈 가지뿐이었지만 오래도록 가지에 앉아 무슨 분 냄새 같은 것이라도
남아 있을지 몰라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답니다지금 그 청춘 남녀들은 봉우리로 누워
두런두런 꽃 시절을 나누겠지만
아직도 봄은 그 가지에 목매어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부리가 닳도록 우짖는 저 새는 어제의 새가 아니며
염속산을 넘어온 바람도 어제의 바람이 아니고
그 바람 바람에 흔들리며 피던 사람들도 어제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새가 우니 봄도 아픈 줄 알았지만
꽃이 지고 우리가 지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후평리 1168번지 산벚나무’ 전문
정 시인은 시 형식을 빌린 시인의 말에서 “버리는 일로 나는 시작된다 / 태어나 처음 한 일도 울음을 버리는 일이었다 // 어떤 일은 절로 버려졌고 / 어떤 일은 의식적으로 버렸다 // 생강꽃이 피어나고 / 마지막 한 송이가 지기까지 버리지 못한 흔적들 / 닭은 새벽마다 목청을 높이지만 / 그럴 수 없다는 내 목청이 더 높을 때가 많다 // 생강나무가 결국 꽃을 떨구듯이 / 달이 어느 순간 빛을 버리듯이 // 버려야 하는 것을 그린다”고 삶을 고백했다.
성주문학회 배창환 시인은 “그는 가야산 부근 산골에서 나고 자라 도회지로 떠났다가, 고향의 흙과 바람, 물과 별, 그리고 무수한 생명들의 부름에 답하여 귀향한 농부 시인이다. 그가 첫 시집 <새를 만났다>에서 땀내 달콤한 성주 참외를 ‘누이의 이마처럼 맑다'(‘소금 열매’)고 노래했을 때 나는 그 놀라운 직관과 깊은 사유, 묘사력을 찬탄했는데, 벗할수록 참 과묵하고 솔직한, 천생 흙의 시인”이라고 추천의 글을 썼다.
권성훈 문학평론가는 “정동수의 이번 시집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는 바로 자신이 새로운 언어로서 세계를 발명해 놓은 감정의 언어로 집약되어 있다. 거기에 ‘가슴에 표적을 그리고 / 표적으로 살아왔’던 시인의 삶을 형성화면서 ‘야성의 눈빛이 빛 속에서 빛’을 발아시킨 정―산물”이라고 평했다.
현재 성주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 시인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시와문화>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앞선 시집으로 <새를 만났다>(두엄, 2018)가 있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