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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거장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은 모두 잔잔한 파도처럼 감동이 밀려와 가슴을 적신다. 영화들은 일상의 평범한 언어가 깊은 울림과 행복감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결핍된 인간들의 외로움을 잔잔하게 풀어내는 방식 덕분이다. 영화마다 치유의 감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작가적 성향이 짙은 가와세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실제의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영화를 통해서 치유하고, 상처를 덮고 가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와세 감독은 20대부터 칸영화제와 인연을 맺어왔다. 28살이던 1997년 첫 장편영화 ‘수자쿠’로 칸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진 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이후 칸영화제 경쟁부분에 다섯 번이나 초청됐다. 2015년에 개봉한 <앙: 단팥인생 이야기>는 제68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다.
영화는 일본 전통빵인 도라야키를 소재로 제 각각의 사연을 안은 사람들의 상처와 교감, 치유의 과정을 담았다. 먹을거리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사실 이웃의 따뜻한 위로가 지친 삶을 위로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맥락이 같다.
영화 초반부는 훈훈하다. 단것이 싫다면서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라야키를 만들어 파는 가게 주인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는 체념의 기운이 역력하다. 폭력사건에 연루돼 평생 이고 가야 할 빚을 지고 있는 탓이다. 그런데 양손을 다쳐 잘 쓰지 못하는 노파 도쿠에(키키 키린)가 맛이 없는 센타로의 도라야키 가게에 취직해 깊고 은은한 단맛이 나는 단팥(앙)을 만들어낸다. 60년가량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온 도쿠에는 생의 끝자락에 진정한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던 오랜 꿈을 이룬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소중한 몇 날을 단팥소를 만드는 데 보낸 것이다.
둘은 독특한 관계를 유지한다. 계약서상 사장과 아트바이트 직원이나 단팥소 제조 과정에서 도쿠에가 스승이고 센타로는 견습생이다. 공식적인 지위와 실질적인 위치가 혼재되면서 두 사람은 동지적, 동업자적 관계에 이른다. 둘이 함께 만든 도라야키로 인해 가게는 번창한다.
도쿠에는 어린 시절부터 수십 년간 앓은 한센병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건물에 갇혀 보냈지만,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대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그런 도쿠에를 보며 센타로는 단팥의 진정한 맛을 깨닫고, 그저 참아내듯이 살던 일상이 실은 꽤 즐겁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센타로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불우한 청소년 와카나(우치다 카라) 때문에 도쿠에가 한센병 환자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영화는 씁쓸한 결말로 향한다. 도쿠에는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고, 센타로는 도쿠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마지막에 센타로는 요양원을 방문해 도쿠에에게 단팥죽을 대접한다. 도쿠에는 뜨거울 때 먹는 게 맛있다고 연신 권하는데 센타로는 눈물을 참느라 힘들어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상대의 진심을 들을 때 이것을 즐길 자격에 대해 감사와 죄책감이 섞이는 기분이 온전히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