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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3시 경북대학교에서 이재문 열사 41주기 추모 및 흉상제막식이 열렸다. 지난 8월 25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구치소 수감 중 외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한 이재문 열사의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한 지 약 3개월 만이다.
여정남기념사업회는 올해 3월 경북대학교 본부에 이재문 열사 흉상 설치 제안 공문을 발송했고, 대학은 4월 승인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박석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동지회원, 석원호 여정남기념사업회 회장, 김찬수 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장, 주선국 경북대학교 민주동문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경북대학교 박물관 1층 시청각실에서 열사 약력 보고와 추모사, 시 낭송 순서로 진행됐고, 이후 경북대 사회과학대학 앞 여정남공원에 설치된 흉상 앞에서 제막과 헌화가 이어졌다.
이재문 열사의 딸 이경실 씨는 이날 추모식에서 “4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과 오늘을 비교해보면 세상이 많이 변했다. 물론 아버지가 개인의 아버지로 (자식들) 호강을 시켜주신 건 아니지만, 멋있는 사람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런 생각이 깊어진다”며 “아버지가 가신 길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에 여러분이 함께 해주셔서 이런 날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주형 1996년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은 “상반신만 있는 것을 흉상이라 한다. 민족 복현, 대한민국 전체에서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분들이 보이지 않는 다리가 된 거라 생각한다”며 “여기 있는 모든 분이 그 다리가 되어주셨다. 오늘에서야 추모비를 빼앗겼던 총학생회장이라는 쪽팔림, 자격지심을 조금은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재문 열사, 남민전 결성 후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지난 8월 진실화해위 “국가폭력 피해 인정”
이재문 열사는 193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54년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1957년 4학년 재학 중 영남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했으며, 졸업 후에는 대구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에는 대구일보 사직 후 통일민주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61년 창간한 민족일보가 5.16 군사정변으로 폐간된 이후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1년 후인 1965년 1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2심에선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역 운영위원 겸 대변인을 역임했으며 1974년 인면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1급 수배를 당해 도피생활을 했다.
1975년 4월 9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이 사형당한 후 투쟁 조직을 구상했으며, 1년 후 남조선민족해당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1979년 체포됐다. 이후 1980년 12월 23일 대법 최종심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수감생활 도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81년 사망했다.
한편 지난 8월에는 2기 진실화해위가 이재문 열사의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을 결정하며, 국가 폭력 피해를 인정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근무한 경찰들의 진술과 이재문 열사의 항소이유서, 고문 피해를 본 관련자들 진술 등을 토대로 ‘고문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숨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서울구치소 수감 중 위장질환이 악화된 이 씨와 그의 가족들이 교정당국에 외부 진료와 적절한 치료를 요구했으나 법무부 안기부 등 관계기관이 외부치료를 불허함으로써 이 씨는 기본적인 의료처우조차 받지 못한 채 서울구치소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이번 진실규명 결정은 사형수, 정치범 등에 관계없이 수형자에게도 국가가 건강권과 생명권 등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할 권리가 있음을 알리고, 이번 결정이 위와 같은 유사한 상황에도 미래 수형자 인권에 대한 문제에 있어 진일보된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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