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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겨울을 재촉하던 음력 10월 23일, 쌀쌀한 날씨를 뚫고 법흥에 사는 이산보가 대구에 사는 최흥원을 찾았다. 최흥원의 조카 최상진이 세상을 뜬 후 장례를 마쳤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산보가 뒤늦게 조문을 왔다. 안동에서 먼 길을 조문 온 이산보의 발길도 고마웠지만, 최흥원은 이산보가 전해 준 남인들의 본고장 안동 소식이 더 반가웠다. 그러나 이번 이산보가 전해 준 소식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 당시부터 예안을 포함한 안동지역은 조선 최고 성리학자였던 이황의 학맥이 굳건하게 자리 잡은 곳이다. 당시 이황의 호를 딴 퇴계학은 율곡 이이의 호를 딴 율곡학과 대별되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각각 그들이 발흥했던 지역에 따라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도 불렸다. 조선은 이 같은 학파 중심의 인적 네트워크가 그대로 정치 집단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남학파는 ‘영남’이라는 정치집단이, 그리고 기호학파는 ‘기호’라는 정치집단이 되었다.
이후 영남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어 이 시기가 되면 영남 남인들만 남았고, 기호는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어 이 시기가 되면 노론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 때문에 이들을 각각 남인과 노론이라고도 불렀다. 예안을 중심으로 한 안동 지역은 당연히 퇴계학파의 중심지였고, 동시에 정치 세력인 영남 남인의 본향이었다. 안동 고을의 당색은 남인이었고, 안동의 사대부라면 누구나 남인을 자처했다. 이 당시 대구에 살면서 남인으로 살고 있던 최흥원이 보기에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산보가 전해 준 말에 따르면, 이러한 안동이 달라지고 있었다. 최근 안동의 사족 가운데 노론으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실鄭宲과 안동 사람 안복준安復駿 등이 안동 사대부들을 노론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었던 터였다. 조선팔도 누구에게 물어봐도 안동이 영남 남인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들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안동 내부에서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영남 남인이라는 당색은 학맥을 기반으로 한다. 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학(엄밀하게 말해 성리학)의 학문 구조상 공부는 학습자의 도덕적 당위를 북돋우기 마련이다. 유학의 학맥은 강한 도덕적 자부심에 기반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과 비교되는 다른 학파에 대한 도덕적 우위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도덕적 우위는 학문적 입장만큼이나 이를 지켜왔던 인물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황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이 그랬으며, 이황으로부터 이어진 스승들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남인을 버리고 노론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한 도덕적 우위도 버려야 했고, 학맥과 스승을 배반한다는 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전향, 특히 남인의 본향으로 일컬어지는 안동에서 노론으로서의 전향은 그 당시 남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는 당파로서 영남 남인이 중앙정계로부터 완전하게 밀려난 경신대출척(1680년인 경신년에 남인들이 중앙정계로부터 축출된 사건) 이후 약 70여 년이 넘은 시점이다. 애초 영남 사대부가 중앙정계에 진출한 적도 있었고, 그나마 경신대출척 이전에는 영남의 지원을 받는 근기 남인들이라도 기호 노론과 팽팽한 권력 구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1680년 이후 영남은 중앙정계에서 그 기반을 상실했고, 더 이상 영남의 이름으로 중앙정계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인의 성실성과 노력을 통해 한둘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는 있어도, 조정에서 기호노론과 팽팽하게 맞서는 당파로서의 남인을 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사이에 영남을 더 어렵게 하는 일도 있었다. 영조가 즉위한 지 4년 되던 해인 1728년 이인좌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1728년이 무신년이어서 역사책에서는 무신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이 난은 이인좌를 중심으로 충청 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영남에서는 경상도 안음현 사람인 정희량이 동조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되었다. 이들은 영조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주모자 대부분은 당색이 소론이었지만, 영조는 정희량 등을 소탕하고 영남을 ‘반역의 땅(역향逆鄕)’으로 규정했다. 반역의 땅에서 인재를 선발할 리 만무했고, 영남은 더더욱 중앙정계 진출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사정은 한 세대가 지나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70년 이상 지속되자 영남 남인의 그 단단한 결속력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정을 차지한 노론의 지배는 영남 남인들의 본향인 안동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었다. 조정에서는 안동이 영남 남인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여, 가능하면 골수 노론을 안동의 수령으로 보냈다. 이들은 정책적으로 지역을 혹독하게 밀어붙이기도 했고, 때론 부드럽게 다스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매듭이 풀리는 지점이 만들어졌고, 지방 향권의 구도는 서서히 노론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남인 입장에서 조정의 실권을 잡은 노론이 되면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정계 진출이 가능할 수도 있고, 한양의 고위 인사들고 교류를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안동부사는 안동향교의 향권을 노론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안동부사와 함께 자신들의 세를 확장하려 했다. 남인 내에서도 비교적 결속력이 떨어지는 사대부들부터 노론으로 끌어들이고, 남인들 내의 다툼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들의 편을 만들었다. 이렇게 전향한 사람들을 남인들은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이는 오히려 전향한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기도 했다. 당연히 거센 비난과 원색적 비하가 오갔지만, 이 과정에서 꽤나 신망이 두터웠던 인물까지 노론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맹자는 “고정된 수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도덕, 명분, 의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선비밖에 없다”면서, 모든 정치에서 일차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무항산 70년이면, (물론 제대로 된 선비가 아닐 수 있겠지만) 선비들도 변하지 않는 마음 갖기는 힘들었다. 긴 병에 효자 없는 법이듯, ‘과거 진출하지 못한 70년이면 (일부) 안동 남인도 노론 되는 게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