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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17일 저녁 8시 30분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국제신보가 주최한 ‘부산시민 위안의 밤’ 행사에 압사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공연 진행 중 폭우가 쏟아지자 공설운동장에서 관람하던 시민 4만여 명이 한꺼번에 빠져나오려다 밟히고 넘어지면서 사망자만 67명이 나왔다. 당시 경찰은 좁은 문을 나오려는 시민들의 혼란을 정지시키겠다며 공포를 쏘기도 했다. 후에 공포 발사가 시민을 더 큰 혼란에 몰아넣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참사 이후 원인에 대한 진단과 조사가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959년 7월 18일 자 사설 ‘부산참사는 누구의 잘못인가’에서 첫 번째 원인으로 수만 명을 밤중에 동원하는 행사를 치르고도 소홀한 당국과 공설운동장의 불완전한 시설 문제를 꼽았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군중이 밀집하는 곳에서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짚었는데, 당국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그 후에야 시민 개개인이 공공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반면, <동아일보>는 1959년 7월 19일 자 사설 ‘7.17 부산참사가 준 교훈’에서 “대사고를 저지른데 대한 책임은 누구보다도 먼저 관중 자신들에게 있다고 보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썼다. 그 후에야 공공시설물의 문제점, 경찰의 책임을 언급했다. “이만오천여의 관중이 모인 집회에 불과 팔십 명의 정사복경관밖에 안 보냈었다고 하는 사실은 경찰이 이와 같은 시민일반의 집회에 대하여는 소홀히 여기고 무성의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선거구 내의 선거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명목으로 동원되는 경관이 수백 명씩이나 되었고 야당의 정치적집회에 대하여는 사사건건이 시비를 걸고…”라는 대목에서는 1960년 선거에서 4선 연임을 노리던 이승만 대통령이 내무부, 경찰을 동원하던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1959년 7월 19일에는 국회 내무위원회는 일요일임에도 부산참사와 관련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내무부 장관과 치안국장도 나왔다. 오늘날로 따지면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국회에 출석한 셈이다. 치안유지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내무부장관은 내무부에 책임이 없다며 극구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국민 각자의 도덕심 결여에 책임이 있다”고 회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1959.7.19. 동아일보, ‘국회서 부산참사 책임 추궁’)
도덕심을 강조한 내무부장관 때문인지, 부산참사 이후 관청과 학교마다 표어가 나붙었다고 한다. ‘집단도덕 양양’이란 글귀가 담겨 있었다. 시민에게 도덕심을 촉구하자는 뜻으로 7월 26일부터 한 달 동안 붙었다고 한다.
1959년 8월 18일, <조선일보>는 ‘집단도덕이란 무슨 말?’이라는 보도를 했다. 정확한 언어를 쓰자는 글로 읽을 수도 있고, 군중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는 내무부를 비판하는 글로 읽히기도 한다. “집단이란 말은 단순한 군중이란 말과 다르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행동이 약속된 다수를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목적을 위하여 약속된 목적을 위하여 행동의 구속도 있을 수 있는 뜻을 가진 것이 집단이란 말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도덕심을 집단 적으로 일으키느냐? 다수의 군중을 상대로 말하는 경우엔 공중(공중(公衆))도덕, 국민도덕이란 말이 있고, 또사람의 직책에 따라서는 정치도덕 상업도덕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말을 학교대문에까지 써 붙이게 했으니 어쩌자는 것인가. 말을 만들어도 될 수 있을 만한 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개인 도덕심 결에 책임을 물었던 당시 내무부장관이 바로 최인규다. 최인규는 1960년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던 시민을 상대로 발포 명령을 내리고 진압한 부정선거 총지휘자였다. 4.19혁명으로 물러난 최인규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사형됐다.
천용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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