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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절을 겪은 경험담과 유년기의 원체험을 결합한 작업이 한국 독립영화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속속 출현하는 중이다. 배우와 프로듀서까지 겸하고 있는 윤진 감독의 <걷다보니 아버지가 된다.>는 그런 흐름을 반영한 예시 같은 작업이다.
◆ 코로나 상황이 마련한 부녀 등산길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은 함께 동네 뒷산 공원으로 등산길에 나선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부녀는 인적 드문 곳을 찾은 모양새다. 한동안 뜸했던 바깥바람을 쐬어서인지 딸 정연은 제법 험준한 등산길에도 별 싫은 내색 없이 즐거워 보인다. 둘은 도중에 같이 셀카도 찍어보고 먹을 물과 김밥도 사고 중간중간 휴식도 취하며 마침내 정상에 오른다.
아빠는 딸에게 이것저것 세상 이치와 타인을 대하는 예절들을 힘써 가르치려는 눈치다. 정연은 싫증내지 않고 아빠 말을 잘 따르는 편이지만 정작 아빠의 목소리나 태도는 좀 어설픈 티가 난다. 아무래도 둘은 그렇게 자주 어울려 다니진 않았던 것 같다. 산 중턱에서 좌판을 펴고 등산객들에게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틀어놓은 라디오를 듣던 아빠는 정연에게 ‘송대관’을 아느냐 묻지만 이제 8살 정연에게는 ‘순대 간’으로 들릴 뿐이다. 부녀의 대화는 그렇게 툭하면 맥이 끊기곤 한다.
정상에서 만난 젊은 커플 등산객은 가족끼리 기념사진 찍던 정연이 귀엽다며 귤을 주는데 아이는 그 귤을 먹는 대신 올라가는 길에서 봤던 소원을 빌며 쌓는 돌탑에 살며시 두고 온다. 아빠가 이유를 묻자 아이는 선물을 바치면 소원을 좀 더 들어주시지 않겠냐며 웃는다. 하지만 하산 길은 이 부녀에겐 곤란한 상황의 연속이다. 아빠는 아이 앞에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허둥대고 딸은 돕는다고 나섰다가 수습하기 어려운 사고를 저지르는 식이다. 그렇게 연달아 닥쳐온 위기를 헤쳐 나가면서 머리를 맞대고 수난을 공유한 이들 두 사람은 비로소 한 가족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말이다.
◆ 감독 본인의 기억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근래 상대적으로 드물게 재현되는 편이다. 과거에는 남성 화자가 자신의 아버지와의 추억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써나가는 편도 적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근래 들어서는 드물어졌다. 반면에 어머니에 대한 추억담은 상대적으로 더 다양한 결로 펼쳐지는 중이다. 아버지가 소위 ‘정상가족’이라 불리던 구성형태에서 ‘가장’ 노릇을 하며 위엄을 잡던 시절이 지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공존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그런 중에서 이 작품의 주제와 구성은 오히려 독특해 보일 수 있는 지점을 점유하는 셈이다.
영화는 추억의 일기장 속 내용이 역할이 바뀌어 당사자에게 재현되는 과정의 체험으로 흘러간다. 극중에서 (감독 본인이 연기한) 젊은 아빠는 자신이 아이였던 시절 큰 산처럼 의지했던 아버지의 존재감에 자기가 턱없이 미치지 못할까봐 내내 불안해한다. 그에게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렇게 압도적인 기억이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굳이 그 시절의 가부장적 권위를 쫓아가려 애쓸수록 그는 실수를 거듭한다. 모든 것에 완벽해야 하고 아이에게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사로잡아버렸기 때문일 테다. 변화된 시대상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대신 과거에 대한 향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어린 딸은 무오류의 아빠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저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반가울 뿐이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아빠가 소녀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상상하면 괜히 즐거워진다. 다행히 아빠는 굳이 자신이 온전하게 구현하기도 힘든 자신의 아버지상을 재현하는 대신에 딸의 실수를 위로하고 보듬어주면서 (그가 의도했던 상과는 좀 다르지만) 결국 딸에게 아빠로서 인정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느새 스며들듯 끈끈하게 형성되는 소심한 아빠와 통통 튀는 딸 사이의 정감이 돋보인다.
아빠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선보였던 ‘어른’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재현에 집착한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번지수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 대신 완벽하게 척척 모든 걸 해결하지는 못할지언정 ‘가족’의 역할을 충실히 서로 나누면서 이들은 형식적인 가족에서 공동체로서의 근본형태를 조심조심 갖춰나간다. 영화 속에서 가족이 되는 키워드는 위로와 격려다. 그런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한참 길을 잃고 헤매던 가족은 마침내 하나로 묶일 수 있게 된다. 어렵던 딸과의 관계를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그렇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 코로나19와 불안정노동 시대를 견디는 가족의 초상
영화 속 배경은 딱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재난의 시간이다. 인구가 밀집된 도심을 벗어나 최대한 타인과의 접촉을 줄일 수 있는 산과 들로 나가는 게 주목받던 바로 직전까지의 세태가 고스란히 재연된다. 여기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자신의 아버지처럼 경제권과 위엄을 유지하지 못하는 젊은 아빠의 초상이 두드러진다. IMF 구제금융 이전의 남성 가장들처럼, 취업만 일단 하고 나면 평생직장이 일정 정도 보장받던 시절은 마치 전설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 요즘 시대의 불안한 아빠들을 표상하는 주인공의 행보다. 상시적인 경쟁과 낙오의 불안 아래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지만, 가족 앞에서만은 당당하고 모범이 되고픈 이의 분투기가 영화 전반 내내 펼쳐진다. 물론 그의 노력은 부질없는지라 딸에게 폼잡고 싶던 무리수는 곧잘 헛되이 무력화되고 만다.
그런 곤란함의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딸과 아빠의 소통 부재 문제도 있지만 경제적 곤란도 한 몫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짧은 단편이기에 주인공들의 과거사가 상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몇몇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아빠가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못한 나머지 아내에게 급한 지출을 받아서 써야 하는 형편이라는 걸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가족 내에서 아빠는 실직을 했거나 구직활동 중인 상태로 경제활동은 엄마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바쁜 엄마의 사정 때문에 시간만 남아도는 아빠가 딸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상황과 영화 속 설정은 궤가 딱 들어맞는다. 고개 숙인 아빠의 위축된 초상이 만능인 아빠 행세를 하려는 집착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그런 아빠는 과거의 향수에 연연하다 오히려 망신당하기도 하고, 얇은 지갑 때문에 딸을 방치하고 돈을 구하러 다녀오다 또 다른 사고를 막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아빠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모델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대신에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잘 해낼 역할을 찾아내 자연스럽게 담당한다. 억지로 권위를 추구할 때는 ‘삑사리’를 연발하던 아빠는 위로와 격려를 통해 딸과 거리감 없이 다가선다. 그런 험난한 하루를 겪은 부녀는 뒤늦게 합류한 엄마와 함께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길로 사라져간다.
감독의 과거 기억을 출발점 삼아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바쁜 핑계로 한집에 살면서도 속내를 나누지 못하던 이들에게 닥친 뜻밖의 상황을 변화의 추동으로 삼은 이야기를 펼친다. 이를 위해 주변에서 끌어모은 작은 지원들과 지역에서 함께 고락을 나누던 영화 동료들과의 협력으로 작은 영화를 완성해냈다. 다재다능한 감독 겸 아빠 역 배우까지 소화한 윤진 감독과, 화면에서 내내 통통 튀어 오르는 현실 딸 같은 아역배우 윤서진의 호흡이 보는 이들에게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든다. 제작 과정 뒷얘기를 알면 알수록 보이는 잔재미가 쏠쏠한 로컬영화의 전형이 인심 좋게 한가득 담겨있다.
<걷다보니 아버지가 된다.>에는 시대를 꿰뚫는 통찰이나 입이 쩍 벌어지는 정교한 구성의 현란함은 없다. 그 대신 영화의 제목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가족영화’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비슷한 작품 제목처럼 더불어 시련을 거치며 완성되는 대안적 가족을 형상화한다. 영화 속에서 가족이 배를 채우던 투박한 시골 국수 같은 맛을 우려낸 소품이다.
<작품정보>
걷다보니 아버지가 된다. Becoming father by walking
2022|한국|드라마|21분39초
감독 윤진
주연 윤서진(정연 역), 윤진(아빠 역)
출연 류한빈(엄마 역), 안민영(국수집 사장 역), 변순옥(밭주인 역)
목소리 출연 금태경(라디오 DJ 역), 남가원(공익광고 역)
2022 23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2022 22회 전북독립영화제 지역초청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