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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창고를 열 줄 모른 채, 사람이 굶어 죽으면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을 찔러 죽여 놓고는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칼이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
1581년 음력 9월 29일, 제릉참봉으로 근무하던 금난수琴蘭秀는 오랜만에 제사를 위해 예안의 집에 내려와 있었다. 집안의 대소사도 살피고, 고을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던 금난수에게 예안현 현감 이준종李俊宗이 파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파직에 이준종 스스로도 적지 않게 당황했던 듯하다. 경황없이 떠날 준비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인사평가 시절인 12월도 아닌데 파직이라 하니, 갑작스러운 상황이기는 했다.
이 상황에서 이준종은 고을 사족들과 인사마저 챙길 여력이 없었던 듯하다. 파직된 지방관 입장에서는 때에 따라 부끄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화도 날 만한 상황이니 정상적으로 고을을 떠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금난수를 중심으로 한 예안 사족들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예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간단하게나마 전별식이라도 열기로 했다. 게다가 파직의 이유가 전적으로 예안현감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준종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번 파직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시기는 한창 수확의 계절이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시기로, 경제 대부분의 규모를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1년을 수확하는 시기였다. 다른 계절에 비해 창고도 풍성하고, 덩달아 마음도 풍성하기 마련이다. 수확한 결실을 가지고 지난봄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빌렸던 곡식도 갚고, 세금도 내야 하겠지만, 그래도 인심만은 연중 가장 너그러웠다. 그런데 예안고을에서는 이러한 시기에도 굶는 백성이 나왔다.
1581년은 유난히 흉년이 심했다. 이 흉년은 그 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1580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연초부터 선조는 사헌부로 하여금 가무를 행하지 말도록 지시하고 이를 감찰하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다. 가뭄도 심해 음력 5월이 되면 국왕이 주재한 대책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만큼 엄중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예안현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소출의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굶는 백성들이 나왔고, 소출도 좋지 않았다.
가을에도 굶는 백성의 발생은 사실상 재앙의 예보였다. 최소한 보리를 수확하는 내년 여름 전까지 대부분 백성들은 생과 사의 문을 들락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을에 소출이 좀 있어도 이듬해 봄은 보릿고개에 시달리기 일쑤인데, 가을에 소출이 없다는 것은 당장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기근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기근 위에 부는 찬바람은 전염병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기근은 쇠약해진 백성들로부터 전염병을 이길 힘을 빼앗기 때문에, 같은 전염병이라도 백성들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예안현의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다.
이준종이 파직된 이유였다. 물론 이준종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예안현감인 자신이 자연재해를 불러온 것도 아닌데, 그 결과를 책임지라니 억울할만도 했다. 그 스스로도 기우제를 통해 손이 닳도록 빌어도 봤고, 농사철마다 논밭으로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확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을 터였다. 자연재해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게 전부였지만, 조정은 백성들이 굶는 책임을 현감에게 물었다.
조정은 조정대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지방관에 대해 엄한 평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지방관은 1년에 두 번, 즉 음력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상급자인 도의 관찰사로부터 인사평가를 받았다. 평가 기준은 수령칠사守令七事, 즉 수령이 해야 할 7가지 일이었다. 농업과 잠업의 번성(농상성農桑盛), 호구의 증가(호구증戶口增), 교육의 장려(학교흥學校興), 바른 군정 수행(군정수軍政修), 고른 부역의 부과(부역균賦役均), 빠른 소송의 처리(사송간詞訟簡), 그리고 간악하고 교활한 사람은 없게 만드는 풍속의 교화(간활식奸猾息)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지방관은 상-중-하로 매겨진 종합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평가 결과에 대한 처분 역시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사가 매긴 인사평가에서 하下를 받으면, 그 즉시 파면이었다. 게다가 중中을 연이어 두 번 받아도 하를 받은 것과 같이 치부되어 바로 파직되었다. 심지어 재임 중(지방관 평균 재임 기관이 5년이므로, 보통 10번의 인사 평가를 대상으로 할 때) 중을 두 번 이상 받으면 승진도 힘들었다.
예안현감은 ‘농상성’이라는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터였다. 농사와 잠업이 번성하지 못해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은 호구 증가도 어렵다는 의미이다. 경제적 타격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든 상황에서 교육이나 군정에 신경 쓸 여력은 더더욱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인심이 이반되면서 풍속은 나빠졌을 터이니, 좋은 평가는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그런데 예안현감의 파직은 이러한 인사평가도 기다리지 않은 채 굶는 백성이 나온 시점에 바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평가 기준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조선의 지방관은 자기 관할 지역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했다.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은 이미 예견되었던 문제였고, 지방관이라면 최소한 가을 기근만큼은 막아야 했다. 제대로 대비하고 구황작물을 기르도록 백성들을 유도했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지역 창고를 열고, 상급기관에 구휼 요청도 해야 했다. 지역에 대한 책임은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무한 책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사고는 사람이 사는 한 불가피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불가피성 때문에 지방관에 책임이 없는 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는 게 지방관의 일이었다. 그런 지방관이 자연재해나 사고 탓만 하면서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면, 이는 맹자의 말처럼 자신이 칼로 사람을 찌르고도 칼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조선 조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안현감 이준종에게 파직이 내려진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