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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임은정 대구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부장검사는 검사 세계의 내부 고발자로 살아온 지난 10년을 정리한 저서 <계속 가보겠습니다>를 발간했다.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의 다짐’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임 검사는 전날 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 사건과 관련해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북콘서트 서두에서 임 검사는 “귀한 시간 내주셔서 여기 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언론에 나온 것처럼 제가 공수처에 다녀왔다. 독자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급하게 내려왔다”고 운을 뗐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물볕책방에서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된 북콘서트에는 80여 명의 시민들이 가득 채웠다. 임 검사는 연이은 무죄 구형으로 검찰 내부에서 ‘찍힌’ 당시 징계 상황과 괴로웠던 마음을 토로했고,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언급했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 일을 전하는 임 검사에 객석에선 때때로 응원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행사 전후로는 저자사인회도 열렸다.
‘백지구형’ 하던 검찰 조직에서
임은정은 왜 ‘무죄구형’을 고집했을까
박형규 목사, 윤길중 재심 사건과 임 검사의 ‘고난’
먼저 임 검사는 2012년 당시 민청학련 사건 박형규 목사 재심 무죄 구형 사건과 관련해 당시 자신이 쓴 논고문를 읽어내려 갔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를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논고를 법정에서 읽은 직후 법정에선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임 검사의 논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하던 재판부가 검사가 무죄 구형을 하자 추가 기일을 잡지않고 바로 선고를 했다. 재판부는 당시 고령의 나이와 불편한 몸으로 먼 거리에서 온 박형규 목사를 배려했다.
그게 2012년 9월 6일이었다. 임 검사는 “이제 과거사 재심 대응 매뉴얼이 만들어져 과거사 재심 사건에 무죄 구형을 더러 한다”면서 “그 전에는 백지 구형을 하는 게 검찰 관행이었다. 유무죄를 명확하게 구형하지 않고, 판사에 판단을 미루는 것이다. 당시엔 무죄 구형을 상상할 수 없던 분위기”라고 전했다.
무죄 구형의 1차 난관은 내부 결재다. 당시 중앙지검장은 최교일 전 국회의원이었다. 임 검사는 결재를 해주지 않으면 ‘지시 적법성과 정당성에 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한 검찰청법 7조 2항에 따른 이의제기권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조문과 멘트를 준비해놓고 결재판을 들고 갔어요. 정말 긴장을 했는데, 도장을 딱 찍는 거예요. 당시 공안부 검사는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무죄 선고가 날 가능성이 크다는 건 알고 있다 보니 검사장님께 세게 어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검찰 내부 게시판을 통해 제가 그 ‘투쟁’을 하고 있었고, ‘임은정은 시끄러우니까 어차피 무죄 나올 거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라고 생각하셔서 쉽게 결재를 해주신 것 같아요.”
어떻게 논고할 것인가도 중요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 4호가 헌법 위반인 무효 법률이고, 그래서 무죄’라고만 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임 검사는 “그렇게만 표현하기에는 이 분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제대로 감사하지 않는 것 같았다”며 “재판 당일 1시간 전에 안도현 시인의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시에서 몇 개 단어를 가져와 이런 내용을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임 검사는 ‘권력이 아니라 법을 수호하는 대한민국 검사입니다’라는 민청학련 재심 공판 소회를 전했다. 다만 검사 조직에선 ‘눈총’을 받았다. 임 검사는 “논고문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니가 뭔데 과거사 반성을 하냐’는 이야길 들었다. 술자리에 엄청 불려 다녔고, (상급자들의) 삿대질과 고함을 들어야 했다. 선배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한 달정도 그랬을까요. 검사가 무죄를 무죄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법의 원칙이고, 의무인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되나 싶었다. 내 후배들이 해야할 일을 하면서 나처럼 힘들지 않게 반드시 이걸 바로 잡겠다 결심을 했어요.”
임 검사는 ‘씩씩하게’ 자신의 SNS와 검찰 내부 게시판에 결심이자 선전포고를 전했다. 여러 지검을 옮겨다니면서도 상급자들에게 ‘검사장 승진 안 할 것이냐, 출세 안 할 거냐’는 이야길 들었다. 임 검사는 “공안부에선 나를 ‘빨갱이’ 취급했다”며 “그렇게 조직 내에서 벼르던 상황이다 보니 과거사 재심 사건이 더 이상 저에게 배당되지 않았으면 했다”고 밝혔다.
검찰 조직에선 ‘눈총’
술자리 불려다니며 삿대질·고함 듣기도
“재심 다시 배당 안됐으면 하는 마음도”
그렇지만 또 재심을 맡게 됐다. 이번엔 윤길중 과거사 사건이었다. 당시 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이던 윤 씨는 통일사회당 간부들과 1961년 시위 현장 등에서 장면 정부가 추진하는 반공임시특별법, 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고 외세 배격과 자주 통일을 주장하는 정당 활동을 했다.
재판 첫 기일을 앞두고 무죄 구형을 위한 결재판을 들고 갔다. 차장 검사는 임 검사와 만남을 피하고, 부장 검사는 ‘무죄 구형’에 반대했다. 그때 임 검사는 검찰청법 7조 2항 조문에 따른 이의제기권을 행사했다.
“부장님이 이의제기권이라는 걸 처음 들어보셨어요. 이의제기권을 행사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거든요. 일단 충돌이 생기니까 구형하는 것으로 미루기로 했죠. 그때 대선 시기였는데, 대선 끝나고 서면을 쓰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대통령이 되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었던 거죠. 마음이 복잡했어요.”
무죄 구형을 하면 사표를 내야할 수도 있다는 결심이 따랐다. 대선 이후 부장검사는 임 검사에게 구형에 대한 의사를 재차 물었고, 임 검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임 검사는 “부장검사의 ‘임 검사 자넨 빠져, 이 검사 네가 들어가’라는 한 마디로 직무배제가 됐다. 이 검사가 들어가서 백지 구형을 하는 것으로 된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임 검사는 고민과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라는 선서를 한다. 위법한 명령에는 따를 법적 의무가 없어요. 오히려 불복한 의무가 있는 거거든요. 빠지라고 해서 우리 검찰이 불의한 짓을 하는 것을 팔짱 끼고 지켜보는 게 과연 검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겁하게 검사가 도망가면 안 된다, 여기서 견뎌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께 내가 이번주 금요일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신분의 변화가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내가 ‘검사’라서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임 검사가 결국 ‘무죄 구형’을 하자 당시 보수언론은 ‘얼치기 운동권형 검사’, ‘막무가내 검사’, ‘부끄러운 검사’ 등의 표현으로 임 검사의 행동을 폄하했다. 그렇지만 언론보도, ‘조직 내 눈총’ 보다 힘들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일로 징계를 받게되고, 징계위원회가 열렸어요. 당시 징계위원회에 함께 회부된 사건들을 보면 수 회에 걸쳐 8억 상당 금품수수를 받은 김 모, 피의자와 성관계와 뇌물 수수 혐의가 있는 전 모, 피의자에게 자신의 매형을 변호인으로 알선한 ‘브로커 검사’ 였어요. 나는 검사로서 해야할 일을 했는데, 이런 검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현실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틀린 걸까 싶은 회의가 자꾸 들었죠. 대학 친구였던 후배 검사가 제가 불러도 못 들은 척 하고 지나가요. 그런 전염병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되더라.”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에선 정직 4개월의 중징계가 의결됐다. 임 검사는 징계 취소소송을 했고, 대법원까지 가서 ‘취소’를 확인받기까지 5년이 걸렸다. 임 검사는 “무엇보다 제가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던 백지 구형은 위법하고 부당한 구형라는 판결이 났을 때, 제 눈물을 값진 보석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했다. 임 검사는 징계 취소소송 도중에는 검사 적격 심층 심사 대상에 올라 퇴직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고난 만큼 벅찬 영광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힘들었을 때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거예요. 제가 그때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게 하시고, 만약 달리 희망이 없다면 제가 그 희망이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어요. 희망이 안 보이는 힘든 상황에서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고, 희망이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희망이구나 라고 나의 사명을 깨닫는 것 그것이 크리스찬으로서 직업인으로서의 그런 소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지훈 시인 <낙화> 낭송하며,
“이런 마음으로 살고파”
“법이 내린 판결에 불만 가지면 안 되나요?”는 독자 질문에
임 검사의 대답은?
임 검사는 현장에 참석한 독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적격심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탈락되면 퇴직 명령 취소 소송을 당연히 할 것”이라며 “저는 이길 때까지 싸운다”고 말했다. 또, 좋아하는 시 낭송을 해달라는 요청엔 조지훈 <낙화>의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하는 시 구절을 일부 낭송하며, “이런 지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법원이 내린 판결에 불만을 가지면 안되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임 검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임 검사는 “물론 ‘여론재판’은 재판 기록을 다 살피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안 되고, 위험한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사법권은 주권자가 위임한 권리로 재판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법원과 검찰 권력은 폭주한다”며 “브레이크는 주권자의 함성과 비판”이라고 짚었다.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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