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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인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2011)가 나온 지도 벌써 10년이나 됐다. 인간은 외부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과 혼자이고 싶은 정반대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기술은 인간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더 방대한 외부와 연결시켜왔다. 전자(전화기ㆍ라디오ㆍ텔레비전 등)나 디지털(인터넷ㆍ스마트폰 등) 기술과 달리 인쇄술(책)만 예외적으로 인간을 내면으로 인도했는데, 그마저도 전자책 때문에 위태롭다. 전자책은 ‘언제나 연결된’ 책이다. 전자책을 읽는 독자는 소설을 읽는 도중 관련 웹 사이트를 방문하고 멀리 있는 독자들의 감상을 확인하거나 그들과 실시간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인간은 집중할 때 가장 높은 창조성을 발휘하며 휴식을 필요로 하지만 손 안의 스마트폰은 그것을 방해한다. 옛날에는 약속 시간에 늦을 때 차를 세우고 공중전화를 찾았지만, 요즘은 약속 장소에 당도하기 전에 “지금 어디까지 왔어”라거나 “20분이면 도착해”라는 카톡을 번질나게 한다. 이런 것도 발전일까? 지은이의 가족은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모뎀을 끄는 ‘인터넷 안식일’을 정했다.
좀 더 최근에 나온 만프레드 슈피처의 『노모포피아』(더난출판사,2020)는 앞의 책에 잠시 언급한 노모포비아(nomophobia = no + mobile + phobia) 현상을 한국어판 제목으로 삼았다. 노모포비아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불안 증상(고립공포감)을 가리키는데, 이 용어는 스마트폰 장기 사용이 일으키는 주의력 장애ㆍ과체중ㆍ나쁜 자세ㆍ사고ㆍ수면 장애ㆍ근시 증상을 포괄하지 못한다. 스마트폰 사용자의 3분의 2가 스마트폰이 실제로 울리지 않았는데도 벨소리를 들었다거나 진동을 느꼈다는 연구 보고도 있는 만큼 저런 증상들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다.
『노모포피아』의 원제는 ‘스마트폰 전염병(Die Smartphone Epidemie)’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스마트폰 전염병은 스마트폰 사용으로 근시가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스마트폰이 눈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어린아이와 청소년의 발달 기간에만 나타나고 25세 이상의 성인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책에는 스마트폰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청소년의 100퍼센트가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한국”의 사례가 자주 나오는데, “한국에서는 벌써 어린 친구들의 90퍼센트 이상이 근시를 앓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자료는 2050년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이 근시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근시 환자의 열 중 하나는 시력 상실의 위험이 높다. 그런데 지은이는 스마트폰 전염병을 눈에 일어나는 근시에 국한하지 않는다. ‘Look at Me’라고 불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나르시시즘, 탈진실과 가짜 뉴스의 범람, 확증 편향과 부족화 현상 등의 ‘사회적 근시’ 또한 스마트폰과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말했는데, 박승일은 『기계, 권력, 사회』(사월의책,2021)에서 ‘세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매개’가 들어섰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제 세계 안에 있지 않고 ‘매개 안에 있음(Being – in – Mediation)’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무선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라도, 그 전에 먼저 그것이 구성해 놓은 시공간 환경 ‘안’에 들어가야만 한다.” 한때 세계의 주인은 신이라고 가정되었지만, 매개의 주인은 인터넷을 거머쥔 사람들이다.
다음(Daum)은 2022년 10월 1일부터 로그인 기능을 카카오계정으로 일원화했다. 담합이 있었던지 네이버도 똑같은 날부터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스마트폰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야 했고 인터넷 사용료는 사용료대로 물면서, 내게 필요 없는 스마트폰 요금까지 이중으로 내야 한다. 인터넷이 물이나 공기 같은 공공재가 된 지금, 로그인을 카카오계정으로 통합하는 것 같은 변경은 시민사회의 공론과 승인을 거쳐야 한다. 국가는 대안을 내놓지 않았고, 어떤 언론도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