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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노인의 삶을 다룬 기록영상의 변주
경주의 시골마을 상계리 한 구석, 동네의 끝 어디엔가 자리한 작은집. 그곳에는 팔십 훌쩍 넘은 ‘읍천댁’이 산다. 낡은 집과 무성한 풀들. 전형적인 공동화 직전처럼 비치는 풍경에 관객은 앞으로 펼쳐질 전개를 무의식중에 상상하게 될 테다. 워낙에 이런 소외된 노인들을 광맥 채굴하듯 도처의 방송에서 다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정형화된 패턴과 스토리에 우리가 이미 길들여져 있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히 행정관서 분류대로라면 ‘독거노인’ 명단에 포함되어야 할 읍천댁은 혼자가 아니다. 그에겐 두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들은 집주인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방문해 함께 밥을 먹고 농담을 주고받고 이것저것 작업도 함께 한다. 그 두 친구는 60년 지기인 이웃 ‘전안댁’과 얼마 전부터 새로 사귄 전안댁네 고양이 ‘쫑이’다.
영화는 읍천댁과 전안댁, 쫑이가 함께하는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감독이나 다른 제작진의 개입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할머니들과 쫑이는 자신들의 평소 일상을 늘 하던 대로 계속 이어가는 것뿐이다. 그런 반복되는 풍경을 감독은 열심히 담아내다 뭐하나 쌈빡한 것 걸리면 속으로 심봤다! 외치는 과정의 연속이었을 테다.
영화에는 딱히 별다른 사건도 극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단편 다큐멘터리의 구성적인 이점을 살려 감독은 오로지 기록과 재현에 충실한 정공법을 택한다. 물론 감독의 시선에서 몇 개의 강조는 분명히 해둔다. 그 강조점 표시가 상투적인 순간이 종종 닥치지만, 그 정도면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줄 만한 것들이기에 굳이 트집을 잡을 이유는 느끼지 못했다.
◆ 관계 1. 읍천댁과 쫑이, 만나다
읍천댁은 평소 입담이 좀 걸쭉하긴 하지만 (욕쟁이 할머니급에는 한참 못 미친다) 낙천적인데다 자신의 행동반경, 즉 거동이 썩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좁은 영역 내의 타자들에게 관심과 온정을 베풀고 공생하는 존재다. 이 영화에서 가장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당길 미끼 격인 겁쟁이 고양이 쫑이와의 관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쫑이는 원래 도회지로 나가서 사는 전안댁내 아들 집에서 키워지던 집냥이였지만 (아마도 여러 핑계로 버림받다시피) 전안댁에 떠맡겨진 존재다. 하지만 이미 마을 길고양이 급식소가 되어버린 전안댁네 마당에서 신참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텃세에 시달리던 쫑이는 외톨이의 길을 걷는다. 그런 쫑이가 가련했던지 읍천댁은 쫑이를 챙기기 시작한다. 스스럼없이 집 안에 쫑이를 들여 밥도 챙기고 둘만이 통하는 대화도 나눈다.
둘은 각자의 처지를 잘 아는 듯 보인다. 읍천댁은 쫑이가 아니라면 일상에서 누가 있어 이렇게 말상대가 되어주겠냐며 독백하고, 쫑이는 알아듣듯 야옹하고 화답한다. 그리고 할머니 곁을 든든한 경호원으로 지킨다. 쫑이는 읍천댁과 있을 때면 등 돌린 은둔냥이 신세를 벗어나 말 많고 자기표현 확실한 본래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영화의 씬스틸러로 달타냥처럼 활약해주는 쫑이의 식빵자세와 야옹어 구사, 그리고 전안댁 마당에서 은둔형 외톨이 모드로 구석냥이 신세일 때 모두 시선을 대놓고 강탈해버린다. 맥락 없이 과도하게 고양이 씬을 만병통치약 마냥 남발하기에 이른 근래 독립영화 경향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도 이렇게 알고도 당해야하는 고양이의 마성에 제대로 휘말릴 때는 아무 도리가 없다.
◆ 관계 2. 변경에 펼쳐진 동물의 왕국
쫑이에게서 시야를 확대하면 전안댁 마당에 우글거리는 동네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테다. 도시의 품종묘들과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이른바 ‘코숏’들의 대환장 파티다. 마당에 차려진 끼니를 먹으러 모인 냥이 무리는 세상 아쉬울 것 하나도 없게 느껴진다. 불행히도 <아옹다옹>은 본격 고양이 탐구영화가 아니기에 몇몇 시선을 끄는 동네냥이들이 스쳐가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데 읍천댁 주변에는 고양이만 있는 게 아니다. 감독의 카메라에는 어딘가 구석에서 태평하게 낮잠을 자는 백구와 할머니의 소일거리이자 용돈벌이일 깨밭을 털어먹는 새떼들, 장독대에 붙어있던 청개구리 등 이제 도회지에서는 존재해도 인식되지 못하거나 사라져버린 비인간 존재들이 그득하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풍요로운 환경과 다채로운 존재들에 둘러싸인 읍천댁은 실은 그리 외롭지 않다. 아니 그럴 틈이 없어 뵌다. 하루 종일 곁을 지키는 쫑이와 공감의 언어를 나누고, 새가 (무임승차이긴 해도) 나눠먹을 몫을 허락하고, 청개구리가 제 자리 아닌 자리 못 구분하고 품을 파고들 때는 안전하게 머물다 가길 기원한다. 그런 읍천댁의 태도는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집과 그곳의 인정 많은 주인의 관대함 그 자체다.
◆ 관계 3. 영혼의 동반자, 전안댁과 펼치는 희극적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읍천댁의 영혼의 동반자, 전안댁을 소개할 차례다. 둘 다 본래 타고난 이름 대신 이전 세대 여성들이 흔히 호명되던 방식, ‘누구누구의 아내’로 불린다. 본인들은 하도 익숙해져 놓아서인지, 감독은 개입할 생각이 없는지 그런 개념 정의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엔딩 크레디트에 출연자의 이름이 본명으로 기재되긴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본 이들은 누가 읍천댁이고 누가 전안댁인지 그저 추정해볼 뿐이다. 두 할머니는 젊을 적 이 마을에 출가해오면서 처음 얼굴을 익혔을 터이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났다. 장성한 자식들은 모두 타지로 떠났고 둘을 만나게 한 결정적 동기인 각자의 남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녀들이 겪었을 한국근현대사의 지난했을 고난과 여인잔혹사의 기억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영화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감독이 주목하는 서사는 전혀 다른 측면이기 때문일 테다. 이제 하루에도 두세 번씩 스스럼없이 오가는 사이가 된 둘은 그들과 주변 동식물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소우주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된다. (물론 두 할머니는 바깥 생활도 수행한다. 마을에서 열리는 노래교실도 수강하고 있다. 하지만 짧은 분량의 영화 속에서 둘 외의 다른 인간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읍천댁은 늘 툴툴거리고 전안댁은 넉살좋게 받아주는 콤비 조합이 절묘하다. 둘은 서로 의지해야 함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설명보다는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할 지점이다.
최대한 두 사람이 외부와는 독립적으로 공유하는 것들에 주목하는 감독의 시선은 노골적일 만큼 뚜렷하게 각인된다. 읍천댁과 전안댁은 인간 외의 존재들과도 소통이 가능한 능력자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서로 간의 대화가 가장 친숙하다. 이제는 도시에서 보기 힘들어진 풍경, 밉지 않은 독설과 비속어 가득한 일상의 만담 스킬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친절하게 감독은 할머니들의 경주 시골 방언을 자막으로 빠짐없이 적당히 의역해 게시해주기에 관객은 편안히 대화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 시골 노인들의 삶을 조명하는 새로운 변주의 씨앗
그렇게 실없이 지나가버리면 당사자도 금방 까먹어버릴 소소한 잡담을 쌓아올리던 영화는 지금까지의 만담은 이 순간을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했던 것이라 선언하듯 두 할머니 간의 비밀스런 맹약을 드러낸다.(합의서 같은 건 없지만 말이다) 그들이 천하 태평한 듯 지내는 일상의 성취 너머로 극복하기 힘든 근본적인 제약이 어둠을 드리우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점차 공동화되면서 소멸해가는 시골 노인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려는 의도의 기획은 아니다. 그리고 두 할머니의 현재 삶의 풍경은 아쉬운 점은 있을지언정 그들만의 해법과 대안으로 많은 문제를 극복해낸 상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런 읍천댁과 전안댁이 이룩한 일상의 걸작, 경주 어느 산골에 구축된 작은 현실의 유토피아를 부감 샷으로 천천히 조망한다. 두 할머니와 인간 아닌 이웃들의 영토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당사자도 관찰자도 모두 알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어지기를 누구나 영화를 보고 나면 기원하게 만드는 소박한 진심의 작업이다.
<작품정보>
아옹다옹 Kitty-Chatter
2022｜한국｜다큐멘터리｜19분
감독 김본희
출연 하무순, 김필선, 쫑이
배급 미닝오브
2022 19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2022 19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2 23회 대구단편영화제
2022 4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