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올드보이들에게, 아름다운 은퇴를 고함 ‘어벤져스:엔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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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마지막은 아름답지 않다. 끝이 언제나 아쉬워 작별을 늦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철 지난 전성기를 더 누리려 발버둥 치게 된다. 성공을 뜻하는 부나 명예, 권력, 명성 등을 내려놓는 게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절정의 순간에 은퇴를 결정한 이에게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낸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콘텐츠는 대중의 관심을 오래도록 끌기 위해 물리적 시한과 생명력을 늘어뜨린다. 그러면서 부적절한 상황 설정과 들쭉날쭉한 이야기 전개로 극의 긴장과 완성도가 떨어진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팬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당초 정해둔 끝을 잃어버린 채 광팬들에게 둘러싸여 인기만 실감한다. 대중의 사랑을 받던 영화와 드라마가 결말에 이르러 냉랭한 반응을 얻게 되는 대목이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은 “이보다 완벽한 마무리는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는 지난 11년간 쌓아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총 정리하며 매듭짓는 22번째 개봉작이다. 마블은 이번 영화를 통해 나날이 확장되던 세계관을 한 차례 정리하고 완결하는 결단을 내렸다. 동시에 몇몇 영웅들도 은퇴한다. 대중의 인기를 더 누리지 않고, 끝이라고 생각될 때 미련을 버리고 떠나는 그들에게 용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애당초 세웠던 목표를 이뤘다고 판단해 미련 없이, 더 이상 잡고 있을 이유 없이 박수칠 때 떠나기 때문이다.

사실 마블 영화의 팬이라면 얼추 예상했을 결말이다. 흥행에 비례해 나날이 치솟는 배우들의 몸값을 제작사가 감당하기 어렵고, 고정 캐릭터의 한계를 절감한 배우들이 영화 개봉에 앞서 계약 종료를 밝히기도 했다. 비록 실리를 뒤에 숨기고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영화의 완성도 덕분에 문제가 될 게 없다.

영화는 무려 180분 57초에 달하는 긴 상영시간 동안 ‘팬 서비스’를 보여준다. 전작에서 무기력과 상실감, 패배감에 갇혀 지내던 영웅들이 우연한 계기로 양자역학을 통한 시간여행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마지막 작전을 펼친다. 남은 영웅들은 세 팀으로 나눠 각기 다른 시점의 다른 장소로 가는데, 이는 모두 이전 마블 영화에 나온 장면들이다. 과거로 떠나는 여행은 곧 켜켜이 쌓인 MCU의 역사를 되새긴다.

흘러간 영화의 뒷이야기로 침투한 영웅들은 그곳에서 과거의 자신 혹은 사랑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이때 각 인물별로 특화된 서사와 개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이때까진 대규모 액션은 자제되고 소소한 에피소드가 얽혀 있다. 팬들을 위해 시각적인 부분보다 유기적인 서사를 짜는 데 더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후반부에는 마블의 모든 영웅들이 총출동해 사상 가장 거대한 백병전을 펼친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전투 장면을 선보이는 등 볼거리 면에서의 재미도 흥미롭다. 그동안 영화에 등장했던 수많은 영웅들이 한꺼번에 힘을 모아 싸우는 장면도 오랜 팬들에게 바치는 ‘팬 서비스’다. 마지막에선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 영화를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를 긴 시간 동안 보여준다.

MCU의 시작을 이끈 원년 영웅들이 빠지고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이뤄지는 것을 의미하는 장면도 보여준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은 MCU 제3국면(페이즈3)을 마무리하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제4국면(페이즈4)에선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할 것이다. 지금 비록 떠났으되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는 회자정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아름다운 은퇴는 없다. 젊고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이들은 거의 없다. 새로운 인재들이 구태의연한 세상을 바꿔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지 않는다. 혁신을 외면한 채 자리를 지키는데 주력한다. 그러면서 변(辯)을 고한다.  “그동안 쌓은 오랜 경륜과 연륜을 기반으로~”, “지역을 위해 한 번 더 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조직 기강을 바로잡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자리에 연연하기 위한, 진심이 아닌, 자신이 적임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언사다.

올드보이들이 물러날 때가 됐다. 다음 세대에 시대의 절망과 좌절이 교직되지 않게 하려면 평생 쌓아온 지혜와 경륜은 보태주면 된다. 부조리함이 넘치는 세계에서 진정한 불의에 눈과 입을 닫고 안전하고 빛나는 길만 걸으며 권력에 영합해봐야 쥐어질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절정의 순간에 용퇴를 결정하고 박수갈채를 받기를 권한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