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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살해됐다’는 뉴스를 본 날이면 몸이 아팠다. 건조한 말과 말 사이를 상상하면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친구들과 마주 앉은 어떤 날에는 화를 냈다가 어떤 날은 손을 잡고 울었다. 까딱하면 우리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공용화장실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살해됐으며 길을 걷다가도 살해당했다.
9월 14일 밤 9시, 스토킹 당하던 여성이 또다시 살해됐다. 28살 지하철 역무원이었던 피해자는 3년이 넘도록 스토킹에 시달렸고 11개월간 혼자 외롭게 법정 싸움을 벌였다. 그를 살해한 피의자는 스토킹으로 수사받는 사실이 알려진 뒤 직장에서 직위 해제됐음에도 회사 내부전산망을 통해 피해자의 집 주소와 근무시간을 확인했고, 순찰하던 A 씨를 화장실 앞에서 1시간가량 기다리다가 살해했다.
어떤 의미에서 신당역 살인사건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같은 해 12월 31일까지 약 2달간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 피의자는 818명이다. 이 중 남성 피의자는 82%로 나타났다. 스토킹 범죄 특성상 신고하지 못한 경우를 더하면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지난해 전체 강력범죄 피해자 2만 2,476명 중 여성의 비율은 85.8%에 달했다.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은 알려진 것만 5건에 이른다. 지난해 11월에는 헤어진 연인을 스토킹하다 법원에서 접근 금지 잠정조치 통보를 받고 피해자를 살해한 ‘김병찬 사건’이 있었고, 12월 스토킹 피해로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의 어머니를 살해한 ‘이석준 사건’이 있었다. 올해 2월에는 스토킹으로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이 경찰에게 받은 스마트워치로 신고했음에도 살해당한 ‘구로구 스토킹 살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6월엔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는 피해자가 죽임을 당한 ‘안산 스토킹 살인 사건’이 있었다.
진보정당과 여성단체는 이번 신당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명명하며, 여성을 향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성혐오냐, 아니냐’라는 기초적인 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16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추모공간을 찾은 자리에서 “(신당역 사건을) 여성과 남성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스토킹범죄에 시달리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만, 죽기 전에는 제대로 된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와 성차별 구조, 그로 인한 범죄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특히 스토킹범죄에 대해선 ‘연인끼리 뭐 어때’라거나 ‘좋아하면 그럴 수 있다’는 인식이 피해자의 공포나 재범의 위험성보다 앞서기도 한다.
지난 18일 오후 대구에서도 신당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에선 행복하길 바랍니다’ 같은 문구를 써 붙였다. 지나가던 일부 시민도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스티커가 붙은 판넬을 바라봤다. 친구와 나는 멀찍이 서서 그 장면을 봤다. 그리고 공기업에 취업했다고 함께 기뻐했을 가족과 지옥과 같았을 피해자의 어떤 출근길, 어서 신고하라며 손을 잡아줬을 친구들 같은 장면을 순서대로 상상했다.
여성단체에서 성 착취물을 신고하고 지우는 일을 하는 친구는 “죽은 여자의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행복할 수 있었을 시간을 상상하다 보면 그 여자가 꼭 나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여성의 거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불법 촬영으로 여성을 협박하고 억압해도 구속되지 않는 사회에서 발생한 신당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 범죄다.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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