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나는 가끔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는 어째서 다양하게 해석되며 혼란을 가져오는 것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등의 의문을 가지곤 한다. 주위에 “민주주의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질문을 받은 이들은 대체적으로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과 같은 이념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맞는 말이다. 그 말은 반대로 현재 민주주의는 그런 가치가 결핍되어 있고, 상실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 높은 의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해야 하지만, 이미 우리를 강하게 짓누르는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와, 그것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평등, 현실인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직 민주주의가 계급의 저항 무기로 유효하다면 위에서 언급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어원적으로 정의하면 ‘인민의 지배, 인민대중의 자기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의 권한을 누군가에게 양도할 이유도 없으며, 누군가가 나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무계급 사회를 지향한다. 하지만 현실은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를 이야기 할 때 많은 책들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자율적 통치는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페리클레스가 ‘권력이 소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법 앞에서 평등합니다’라고 했듯 말이다. 아테네는 외견상 고전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인 자유, 즉 정치적으로 평등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 사회에서의 인민은 노예·여성·조세를 납부하지 못하는 자유민이 제외되며, 엄격하게 아테네 혈통을 이어받은 성인 남자 자유민만을 이야기한다. 즉, 아테네는 여전히 계급지배사회며 배제된 자들이 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민주주의를 논하며 인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대중의 교육 수준과 정치적 이해를 고려했을 때,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진정한 항해사’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민주주의가 자유―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평등―를 보장했을 때 권위·유지·질서·안정과 양립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대중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가난한 자의 단어였으며, 가난한 자―무산계급―들을 위한 권력 지배 형태로 이야기 되었다.
이후 아테네와 로마, 이탈리아 공화주의를 거쳐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민, 군주, 귀족, 국가라는 상호대립인 모순적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인민의 자기지배―라는 근본적 물음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18세기쯤에 접어들면 대담한 고백들이 시작된다. 홉스, 로크, 루소 등 자유주의자에 의하면 인민은 국가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자연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개인―여기서도 남성, 부르주아지―들이 추구하며 침해받지 않고 보장받는 것이 중요하며,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한 계약―즉, 인민의 동의―에 의해 국가라는 조직이 성립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셋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재산권 즉, 사적 소유와 경쟁적 시장경제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같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사회 통합 시스템으로 민주주의를 포섭하여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민주주의>로 전환된다. 봉건적 사회질서와 절대주의 정치질서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투쟁 과정에서 성립한 자유주의는 이제 개인들의 이해와 자본주의 사회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나아간다.
시민의 모든 권리 가운데 사유재산권은 최고 권리가 된다. 재산을 지닌 부르주아는 모두 법 앞에서 평등하다. 여기서 다수 인민대중은 소수자본가에게 예속된 법률 앞에서 배고픔의 자유, 실업의 자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신분상의 자유에 놓이게 된다. 이는 모순적이게도 사회적으로 평등하다고 간주된다.
민주주의의 근본 물음이었던 ‘인민의 자기지배’의 고민은 ‘국가에게 권력을 위임한 개인들’이 어떻게 상호조화를 이룰 것인가, 국가·통치자의 절대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등의 ‘제도적 고민’으로 전환된다. 게다가 공적인 일 ‘공화’에 인민이 참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의회·정당을 주요하게 고려하게 된다. 자유주의 내에서 민주주의는 대의제·간접제·의회제 등의 수단으로 어떻게든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며 인민이 거부·승인하는 한해서 정치적 엘리트 소수가 수행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봤던 슘페터의 말에 수긍한다면 더 이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급과 권력, 모순된 현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립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 자유로운 시장경제, 계급지배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적 정부는 불가능한 것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자유주의 전통인 ‘개인’으로서의 인간, 자유로운 이기심으로 사적 소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산물로서의 인간이며 사회관계 속에서 규정되어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인간이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임노동을―자본의 생산관계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사적노동, 잉여가치의 착취 등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되는 분석을 통해 자유주의가 주장하듯―자유로운 사적 계약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생산관계의 문제는 비정치적인 것, 국가와 무관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유주의와 선을 그었다. 그는 자본주의사회를 ‘지배계급의 사회’로 보고,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필연적이며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 역사 발전이라고 말했다.
착취와 배제, 계급모순이 내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면 이제 민주주의는 선언하는 수준의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권력뿐 아니라 사회적 권력까지 실현시킨다. 엥겔스의 말처럼 “국가는 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멸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했던 더 이상 존재 이유도 없어질 것이며, 인민이 권리를 양도할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국가가 했던 업무와 행정은 인민이 행하는 공공자치를 통해 그 역할은 희미해져 갈 것이다. 사유재산권이 최고의 권리로 지배계급에 의한 착취가 있는 모순적인 사회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폐지되고 지배계급의 사회가 없는 무계급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고민하자.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가정, 공장, 지자체, 정당, 국가 등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배계급이 더 많은 착취와 이윤을 위해 민주주의를 선택에 따라 필요로 하며, 다양한 계급들은 억압과 배제의 현실에서 저항하기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민주주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복지와 소득분배, 대의제로 상징되는 정당과 의회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라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직접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고려되는 민주주의라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불평등/억압/배제된 자들의 저항하는 운동일 때만 의미를 가질 것이다.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형태, 제도는 우리의 성과물이자 경계물이다. 그것이 또 다른 억압과 배제를 만들어내지 않는지를 모색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을 채워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남구현 등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메이데이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후마니타스
한국정치연구회사상분과 『현대민주주의론1』 창작과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