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서래에게 권하는 위스키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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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돼 있습니다.

휴가철을 맞아 뉴스 공해에서 떠나보자. 적당히 무르익은 위스키를 잔에 따른다. 노징 글라스가 있다면 더 좋다. 조명과 음악은 그윽하게 해야 한다. 쿨재즈도 좋고, ‘안개’와 같은 한국 시티팝도 괜찮다. 어둑한 곳에서 한 잔 따뤄 두면, 향로에 분향한 듯 엄숙한 마음마저 스친다. 내가 차린 내 제사상. 흠향부터 시작이다. 향의 개성을 천천히 느껴보고, 한 모금 입에 담아 굴려 본다. 맛과 향이 미뢰와 후각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동안, 그날 보낸 하루가 그 공간의 분위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침몰한다. 축문을 태운 듯 입속에 잔향이 퍼진다.

휴가철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러 가기 전, 대구 시내 영화관 근처 위스키 바 몇 곳을 돌아다녔다. 영화에 나오는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쉐리’를 먼저 한 잔 먹고, 보고 싶었다. 대만 위스키 카발란 솔리스트는 병당 가격이 20만 원 이상이라 잔술로만 마셔보려 했는데, 아직 대중적인 술은 아니라서 파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바에 진열된 라가불린을 주문했다. 라가불린 증류소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에 있다. 아일라 섬 표층의 이탄을 태워 맥아를 말리기 때문에 훈연향과 바다를 닮은 강렬한 짠맛이 특징적이다. 스코틀랜드의 주조자들이 잉글랜드의 주세 부과를 피하려 밤중에 서둘러 맥아를 말리기 위해 이탄 태운 연기를 쐬었는데, 맛이 오히려 좋았더라는 피트(이탄) 위스키 탄생설이 있다. 바다와 섬이 함께 빚은 술이니, <헤어질 결심>에는 카발란 보다 차라리 아일라 섬의 바다와 파도 냄새를 머금은 라가불린, 아니면 라프로익, 아드벡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헤어질 결심>에서 카발란 위스키는 서래(탕웨이)의 집 서재에 진열돼 있지만, 서래는 단 한 번도 위스키를 입에 대지 않는다. 위스키는 출입국 공무원인 서래의 남편 기도수(유승목)의 소유물이다. 같은 소유물 처지인 결혼이주여성 서래가 손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스키를 먹는 사람은 해준(박해일)이다. 서래의 집에서 위스키를 발견하고 서래를 따라 한번 먹어보려 한 거 같다. 해준은 기도수 살해 용의자 서래를 관찰하면서, 서래를 닮아간다. 그 과정이 위스키를 마시는 과정과도 닮았다. 관찰하고, 호흡을 맞추고, 마침내 전부를 마셔 버린다.

극 중 서래가 먹는 것이라곤 바닐라 아이스크림, 해준이 사준 초밥, 해준이 해준 중국식 볶음밥, 사라지기 전 마신 고량주가 전부다. 서래가 갈구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느냐”는 해준의 반문을 듣고 결심한다. 서래는 무덤을 파고 ‘미결 사건’이 되어 버린다.

▲그 아이스크림에 위스키를 부으세요 (사진 =네이버 영화)

사랑하는 이를 두고 서래는 왜 사라질 결심을 했을까. 혼자 남은 해준의 지옥 같은 심정이 먼저 와닿아서 서래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데. 하지만 한참 뒤 다시 생각해보니, 사랑 말고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었던 서래의 심정도 이해됐다. 서래는 ‘꼿꼿한’ 사람이다. 서래는 미결 사건이 됨으로써 해준을 영원한 숙취에 빠트렸다.

잔잔하고 담백한 영화라 문턱이 높게 느껴질 수 있지만, 차분하게 휴가를 마무리하기에 좋다. 위스키 마시며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서래가 서재에 있던 카발란 솔리스트를 한 모금 마셔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아일라 위스키를 권하고 싶다. 그다음은 켄터키 버번 위스키도 있다. 지금처럼 뜨거운 여름에는 하이볼로, 아니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타 먹어도 좋다. 사랑 말고도 향유할 다른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완전히 붕괴되지 않는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