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아스라이’, 대구 독립영화의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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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아스라이>와의 첫 만남, 첫인상

흑백의 화면, 계단에 앉은 청년에게 느닷없이 유리구슬이 쏟아져 내린다. 날벼락을 맞은 셈인 청년은 뒤를 돌아본다.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에게는 그가 마주 보는 모양새다. 유리구슬 몇 개가 그의 머리를 맞추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2007년에 제작된 독립 장편영화 <아스라이>의 시작이다.

▲영화 ‘아스라히’

김삼력 감독의 작품 <아스라이>를 영화가 개봉한 지 한참 후에 처음 보았다. 작품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20대 주인공의 회색빛 청춘과 대구라는 도시가 연상시키는 답답한 기운, 그리고 이를 질감으로 표현하기 위해 구사한 적외선 필터 흑백화면이 어우러져 빚어낸 막막함의 정서였다. 당시에도 (한국 독립영화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답답한 20대의 방황과 진로고민을 담은 영화는 이미 허다하게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본 작품 <아스라이>는 그중에서도 ‘지역’을 배경으로 삼은 희소성과 그 배경에 기인한 적당히 느슨한 구성이 등가교환을 이룬다는 그런 정도였던 기억이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장편영화치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다 예전에 별다른 정보 없이 영화를 봤었던 데 비해 본 작품의 몇몇 배경에 관한 주변지식을 추가로 갖춘 상태로 재관람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 편이다. 그런 사연 덕분에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처음 볼 땐 보이지 않던 요소들을 찾아내는 발견의 기쁨도 제법 쏠쏠했다.

영화 <아스라이>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대구지역편이라 제목을 붙여도 충분히 좋을법한 작품이다. 영화에 미친 주인공들이 영화에 빠지고 결국 자신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에 빠져드는 이야기다. 다만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독립영화이고, 하필 그가 활동하는 곳이 (영화의 불모지) 대구라는 점이 특기할 부분일 테다. 그리고 그 차별적 면모는 이 영화에서 아주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유리구슬을 뒤집어쓰던 청년, <아스라이>의 주인공 상호는 그 조건의 제약과 한계를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2_재능도 돈도 운도 없는 영화광의 길

대학진학을 예정에 둔 주인공은 그 찰나의 유예기간 고교 방송반 후배 태진의 부탁으로 학생단편영화 제작에 참여한다. 평소 1년에 영화 1편 볼까 말까하던 상호는 자신이 제작으로 참여한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제에서 (정윤철 감독의) 단편 <기념촬영>을 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린 뒤 영화를 하고 싶다는 결심에 이른다. 이후 그의 10년간, 20대를 관통하는 삶의 궤적은 많은 이들이 추억에 잠기거나 쓴웃음 짓게 할 전형적인 영화광의 ‘전설’이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영화로 성공하기엔 악조건을 줄줄이 달고 있다.

▲영화 ‘아스라히’ 스틸 사진

첫 번째.
주인공은 단편영화 프로듀서를 해 봤다고 하지만 학생 단편영화에서 전문적인 소양을 갖췄을 리 없다. 사실상 문외한에 가까운 상태, 그렇다면 체계적 교육을 받아야 영화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영화 속이건 실제 현실이건) 당시 대구에는 영화를 배울 전문교육기관이 없었다. 즉 배우려고 해도 배울 곳이 없다. 주인공이 영화를 체계적으로 배우려면 재수하거나 편입해서 타지역(주로 서울) 영화학과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후술할 두 번째 조건 때문에 이는 충족되기 거의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두 번째.
주인공은 지방 거점 국립대학교, 즉 대구 경북대학교에 입학했다. 국립대학교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등록금으로 학비를 충당 가능하기 때문에 서울 유학을 가기 힘든 형편의 지역 학생들이 많이 진학하던 학교다. 상호의 집안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밝혀지듯) 그가 취업을 포기하고 꿈을 좇기엔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 전공도 상대적으로 취업이 잘 된다는 편인 신문방송학과다. 영화 도입부에서 보이듯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 활동을 하기도 했고, 취업에도 유리하다는 고려도 작용했을 테다. 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집안 형편을 들면서 역정을 낸다. 집안이 웬만큼 여유롭지 않은 한 영화를 하겠다고 안정된 직장 찾기 나쁘지 않은 학업을 포기하겠다는 자녀를 그냥 둘 부모는 잘 없다.

▲영화 ‘아스라히’ 스틸 사진

세 번째. 마지막 악조건이다. 그는 다른 악조건을 돌파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여럿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림을 당하듯 영화를 그만두라는 냉대와 조롱에 시달린다. 문제는 그게 자신도 일정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란 것이다.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영화 활동에 빠져 수업도 빼먹는 학생에게 철이 덜 들었다며 진로 상담은커녕, 세상 쓴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어렵게 영화의 기술적 측면을 배우러 들어간 프로덕션에선 제대로 가르쳐 주지는 않으면서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며 기합과 폭언을 일삼는다. 그나마 지친 일상에 위로가 되어주던 여자 친구조차 그가 재능이 없다며 구박하고 화를 낸다. 영화를 결심하던 초입에 함께 의기투합했던 영화동지 격인 후배도 술자리에서 주인공에게 재능이 없다며 울컥 화를 낸다. 하지만 그는 반박하지 못한다. 그저 영화를 하고 싶다고 자조할 뿐이다.

이런 암울한 설정은 실제 대구에서 10대 시절부터 이 영화, <아스라이>에 이르기까지 30편의 영화를 찍었던 김삼력 감독과 그가 20대 내내 몸담았던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가 걸어온 길의 재연 드라마 수준 이야기다. 그런 내용적 특수성 때문에 본 작품은 다층적 성격을 자연스레 띠게 된다.

(1) 보편적으로는 다양한 경로로 정해진 사회 코스를 따르는 대신에 자신만의 꿈을 찾고 시련을 겪는 (독립영화 단골 소재인)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 구조를 따른다.
(2) 좀 더 내밀하게 들어가면 한국에서 영화를 꿈꾸는 이들이 겪게 될 ‘예정설’ 수준의 체험담이 이어진다.
(3) ‘하이퍼’ 리얼리즘 차원으로 집중되면 결국 지역 독립영화인 생존 르포르타주로 정련되는 셈이다.

이런 중층적인 영화의 단층은 영화를 접하게 될 관객들에게도 각자의 경험수치와 시선에 따라 본 작품을 어떻게 소화하게 될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테다.

3_지역 독립영화인 생존기록으로서의 의의와 가치

청춘의 우울한 현실을 다룬 영화 이야기는 한국 독립영화에서 결코 적지 않은 편수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일단 영화 <아스라이>에 대해선 지역 독립영화인들의 자전적 체험담 측면에 집중해서 언급하려 한다. 이 작품은 감독의 자전적 체험과 실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역의 독립영화 제작 및 상영환경을 재연 드라마 수준으로 옮겨 놓았기에 실제 사건과 배경이 제법 진득하게 녹아들어있는 편이다.

▲영화 ‘아스라히’ 스틸 사진

주인공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영화의 매력에 빠진다. 처음엔 학교 영화 동아리의 문을 두드린다. 실제 지역 모 대학교 영화 동아리가 등장하지만 대구의 영화지형 상 동아리는 영화 창작보다는 예술영화 감상위주의 고담준론이 팽배한 상황으로 묘사된다. 자연히 창작에 뜻을 둔 주인공 상호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같은 영상 계통이라 장비를 구하거나 지원을 받아볼까 하는 생각에 그는 학과 선배들에게 문의해 본다. 하지만 신문방송학과 내에서 주인공을 이해하고 인정해주거나 격려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결국 그는 학교 바깥, 장외로 나가서 그와 뜻이 맞는 이들을 찾게 된다. 영화 제작을 꿈꾸는 이들과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되지만 다들 똑같이 장비도 지식도 돈도 어느 하나 온전히 갖춘 건 없다. 집에서도 꾸준히 냉대를 받지만 그는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학업은 팽개친 채 영화를 찾아 떠돈다. 흐르고 흘러 지역독립영화협회 일을 하게 된 주인공은 이것저것 의욕에 차서 일을 벌이지만 시행착오와 고생은 끝나지 않는다. 이 전개 속에 2022년도로 23회째를 맞는 대구단편영화제의 기원이 묘사되는 건 보너스다.

해당 파트에는 대구경북 독립영화협회의 2000년대 초반 10년의 역사가 사실상 압축되다시피 극화되어 있다. 그래서 <아스라이>가 대구지역 독립영화운동사 관련 기록영화가 아님에도 그에 준하는 의미를 부가적으로 갖추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실제 당사자마다 입장이 다소 상이할 법한, 일부 예민한 개별 사안들을 뺀다면 동시기 여타 지역들의 독립영화단체 활동상과 <아스라이> 속에 담긴 풍경은 크게 궤를 달리 하진 않는다. 주인공은 그 전형적인 활동과 경험을 공유하고, 명멸했던 당시 활동가들의 좌절과 한계를 골고루 겪는다.

지역 독립영화제를 진행하면서 실무자로서 겪는 많은 일화들은 실제로 감독이 체험한 부분일 테다. 거기에 더해 이 영화에는 당시 지역 독립영화협회 역대 사무국장 2명이 유력한 조연으로 함께 출연해 자신들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살린 생활연기를 펼친다. 지금 영화제 상영 실무를 맡은 이들로선 상상조차 힘들 만큼 2000년대 초반 영화제 준비를 위해서는 상영 포맷 정리가 첩첩산중이었던 기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대목이 추억에 잠기게 만든다.

그 외에도 단체 활동의 내부적 갈등, 지원을 받고 정산을 해야 하는 실무, 주먹구구식 제작현장의 그릇된 관행과 수공업적 구조, 영화인 내부의 왜곡된 관계들 같은 절반은 온존해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시대 흐름에 묻혀간 기억들이 영화 곳곳에서 시간여행 체험처럼 출몰한다.

4_현실의 감독을 끌고 가는 영화 속 자화상

그렇게 주인공 상호는 십년을 영화에 매달리지만 30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안정된 장래도, 힘이 되는 연애도, 내세울 작업도 무엇 하나 얻지 못한 상태다. 차마 가족에게 손을 내밀거나 지원해 달라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하며 일하는 데다 영화 제작비도 충당해야 하기에 그는 늘 얻어먹거나 궁상을 부려야 한다. 그런 습관은 어느새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든다.

▲영화 ‘아스라히’ 스틸 사진

단체 선배들이 조금씩 보태주거나, 술과 밥을 사주기는 하지만 거기에 의지해 살 수는 없는 노릇. 운 좋게 들어온 초중고 방과 후 수업 강사나 지역 매체 칼럼 기고 및 방송 출연 등으로 푼돈을 벌어 급한 용돈으로 충당하고, 영화 제작은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결과물이라도 적당히 포장해 꾸준히 영화제에 출품하고 상금이나 지원으로 어찌어찌 마련한다. 하지만 늘 정체된 기분을 면할 수 없다. 처음에는 꿈을 찾는 상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여자 친구도 이제 돌아가는 물정을 알기에 그에게 미래가 없다 생각한다. 여전히 겨우 하루하루를 넘길 뿐인 일상이 오히려 더 그를 지치고 벽에 부딪히게 만든다.

그렇게 주인공은 끊임없이 부유한 채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에서도 할 말이 없는 처지다. 함께 영화로 어울리던 동료들 중 일부는 실력을 갖추고 영화계 내에서 길을 모색하러 하나둘 떠난다. 그렇게 그는 과거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점점 외로워져만 간다. 하지만 안쓰러울 만큼 주인공은 포기할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영화를 놓지 않는다. 그런 면모가 누군가에겐 답답해 보일 테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청춘의 어떤 초상으로 자신의 잃어버린 꿈이나 열망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 테다.

▲영화 ‘아스라히’ 스틸 사진

감독은 그렇게 90% 자신의 자전적 경험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갖고 첫 장편을 ‘재능’을 뛰어넘는 ‘열정’으로 완성한다. <아스라이>는 독립영화로선 상당한 주목을 얻어내고 개봉도 소규모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3편의 저예산 장편영화를 2012년까지 추가로 선보이지만 이후로는 그가 영화 속에선 끝내 얻지 못했던 안정적 기반을 얻게 되면서 작품 활동은 반대급부로 보기 힘들어진 상태다. (김삼력 감독은 현재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의 마지막 작은 반전과 함께 주인공이 꺾일 듯 꺾이지 않고 계속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현장 스케치와 함께 소설가 김원일의 작품 <어둠의 혼>을 인용한 ‘개구리의 높이뛰기’ 대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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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는 처음에 한 뼘 밖에 못 뛴다.
그 다음에 한 뼘 반, 그 다음에 두 뼘.
그럼 개구리는 하늘까지 뛰겠네?
그렇진 않지.
그럼 왜 뛰는데?
그냥 뛰고 싶어서 뛰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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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인디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곡 “절룩거리네”가 흐른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울려 퍼진다. 이 의도성이 철철 넘치는 마무리는 영화 속 주인공 상호에게 자신을 투영한 2007년 영화 제작 당시의 감독 자신과 동료들에게 바치는 송가일 테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영화 속 외골수 지역 독립영화인들의 삶을 보면 퍽 안쓰럽지만 사실 지금 현재도 기본 조건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성공한 인디 뮤지션으로 공인되는 가수 장기하가 2000년대 초반에 모 인터뷰에서 평생 음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 게 있다. ‘연봉 1천 몇 백만 원대 수입과 작은 임대아파트, 소형차 한 대’라는 소박한 여건은 결코 무리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수준은 지역 독립영화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청년예술인들에게 여전히 꿈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작품정보>

아스라이 Dimmer
2007|한국|드라마
2008.01.11. 개봉|85분|12세 관람가
감독 김삼력
주연 김상석(상호 역), 심재원(지훈 역), 강찬양(수연 역)
출연 최태규(태진 역), 서보익(형직 역), 김신록(다은 역), 이유수(신방과 교수 역)
남태우(태욱 역), 차순배(영훈 역), 양지호(아버지 역), 최정락(프로덕션 실장 역),
임 준(촬영감독 역), 이소현(여배우, 상호 친구 역)
제작 이승태, 정지원
각본 김삼력, 안철호, 최주연, 정지원
촬영 조영직
조명 윤상신
음악 박남예
편집 최선홍
음향 정희구
미술 이혜민
배급 인디스토리
제공 왓챠,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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