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알파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원인은 일자리를 기계가 빼앗아 갈 것이라는 우려다. 또, ‘주어진 데이터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약한 인공지능’인 알파고를 넘어서는,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에 대한 우려다. 더구나 그 상상이,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같은 악마적 존재라면 공포감은 최대치가 된다.
우선 주체성 있는 인공지능은 ‘현재로서는’ 문화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터미네이터 등 공상과학 영화에 많이 노출된 젊은층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처녀귀신, 달걀귀신에 익숙한 과거세대와 매우 똑같은 이유로, 젊은층은 공상과학적 주체성들에 감응한다. 하지만 스티븐 호킹조차 앞으로 100년 이내에 그러한 것이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한 점에 유물론자들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공지능의 고도화와 이에 맞물린 문화현상은 ‘기계적 잉여가치’(이진경)라는 환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역시 기계가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가치는 응고된 인간노동’인데, 이에 대입하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기계는 곧 ‘인간’인 것이다. 맑스는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즉,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중농주의자인 케네, 리카아도를 거쳐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국민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업적이었다.
알파고가 주체적 인공지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물신성을 꿰뚫어보지 못한데서 비롯한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물신숭배는 인간이 만든 사물에 초자연적인 힘이 서려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과학발달이 낮은 시기에는 종교로 나타났다. 인간이 상상하여 생산한 절대자를 인간이 믿고 그의 뜻에 결박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품 역시 인간이 생산하였지만, 마치 상품 그 자체가 주체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도 물신숭배다. 상품에 적용하면 상품물신성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밝혔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는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즉 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즉, 인간의 노동생산물인 상품이 마치 자립하여 독자성을 지닌 것처럼 착시를 일으킬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물신성의 원리가 기계에 달라붙으면 기계를 신비화하여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 현재 알파고에 대한 과잉 논란은 이러한 현상이다. 알파고는 인간실천의 산물일 뿐이다. 진실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알파고 그 자체의 신비성이 아니다. 기술발전과 생산력 향상의 성과를 인류가 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체제를 획득하는 문제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약한 인공지능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우려다. 이는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다. 고도의 기능을 지닌 기계사용이 늘어나면 당연히 일자리가 대폭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즉 자본가 지배구조가 고정불변하다는 보수적 전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하여, 기계의 생산성 증대를 노동시간 단축에 기여하도록 하고, 기계의 편리성을 인간 복지에 기여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즉, 자본가 지배구조를 혁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논의에서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물신성이 지배관계를 은폐한다는 점이다. 상품 물신은 상품과 상품의 정당한 관계 이전에 생산자 사이의 관계임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인정되는 이러한 상품의 신비성은 “다른 생산형태로 이행하자마자 곧 사라져 버린다”(자본론). 즉 상품물신성은 자본의 지배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다. 종교물신성 역시 종교 지도자와 왕과 귀족의 지배구조를 위한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기계물신성은 인간과 기계를 대립관계로 놓으면서 사람들을 현혹하여, 그 실제인 자본가 소유를 은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항구적으로 가져가고자 한다. 그래서 물신성에 대한 저항은 곧 정치적인 것이다. 즉, 알파고에 대한 신비화 전술에 말려드는 것은 자본가의 헤게모니에 말려드는 것이다. 기계와 인간의 대립구도를 과장하는 이유는 단순한 ‘흥미’보다 더 깊은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혁명에 의해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자본주의의 모순은 심화할 것이다. 그럴수록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심각해질 것이고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서만 공황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인간들은 가장 열악한 노동에 내몰리며 자본에 매달려 주체성을 상실하는 노예적 존재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노동자·민중과 인류의 저항은 더욱 뚜렷하게 그 필요성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