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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창조경제’의 수혜를 입은 영화, 탄생하다!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감독은 지역의 독립영화인들이 진행하는 소규모 영화 워크숍과 시나리오 모임 활동을 통해 독립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고 한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빨간 약을 선택한 셈이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을 테다. 그래도 하필이면 대구에서 말이다. 그렇게 길을 들어서는 바람에 근근이 영상작업과 생계활동을 병행하던 감독에게 가뭄에 콩 나듯 제작지원이 들어온다.
박근혜 정부 당시 유행하다 이제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간 ‘창조경제’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위치한 건물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조건으로 단편영화 제작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는 독립영화 제작에 관련된 지원사업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하나(대구 다양성영화 제작 지원사업) 뿐이던 시절이다. 아마 ‘창조경제’가 독립영화에 순기능을 해준 아주 드문 사례이자 뜻밖의 행운일 테다.
감독은 대학 전공을 살려 심미안을 갖고 해당 공간에 주목한다. 해당 센터 건물은 과거 대한민국의 산업화 초반 주요 제조업에 속하던 섬유산업 공장이었다. 특히 대구는 20세기 후반, ‘섬유도시’라 불릴 정도로 관련 산업의 메카였고 별다른 제조업 기반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구시 차원으로 쇠락해가던 섬유산업 생명연장을 위한 다양한, 하지만 헛되고 부질없는 시도가 거듭 죽지도 않고 또다시 돌아오곤 했다. 대구 섬유산업 전성기를 상징하던 제일모직 건물이 하필 센터의 현 소재지였고 외관도 거의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감독이 이 포인트를 놓칠 리 만무했다.
2_조금 특별한 뱀파이어, 마치 멸종위기 희귀생물인 것처럼
평화시장과 동일방직, 청계피복노조와 여공문학, 호스티스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법한 인적 없는 폐공장 자리가 이 영화 속 주요 배경이다. 여기에서 감독은 뜬금없이 기이한 조합을 제시한다. 이곳에는 뱀파이어가 산다. 바로 뱀파이어 전설의 무대로 해당 공간을 차용해버린 것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쇠락한 슬럼가에 숨어 잠복한 채로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든 그런 존재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뱀파이어는 브람 스토커의 기념비적 작품 <드라큘라 백작> 또는 레 퍼뉴의 <카르밀라>나 존 폴리도리의 <루스벤 경>들로 대표되는 이미지들이다. 마법적 매력과 우아한 외관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면이 좀 있긴 하지만) ‘귀족’적 풍모의 결정체들이다. 이후 대중문화에서 등장한 대부분의 뱀파이어는 귀족이나 우월한 존재들로 묘사되는 경향이 굳어졌다. (그와 반대로 하층민 혹은 노동자의 이미지는 ‘좀비’가 계승한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은 그런 위험하고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들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19세기에 뱀파이어가 되어 이미 수백 년을 산 존재들이지만 이 뱀파이어들은 외양도 능력도 생전에 비해 크게 도드라진 게 없다. ‘사냥’을 위한 능력이 좀 더 야생에 가깝게 발달했다는 정도가 강점이지만 낮에는 활동하기 힘들다거나 같은 핸디캡에 비하면 썩 이로운 부분도 아니다. 게다가 만약 정체가 밝혀진다면 금방 공권력에 의해 처단될 건 시간문제다.
그런 옹색한 처지이다 보니 오직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들에겐 오히려 저주의 형벌에 가까울 테다. 원래 뱀파이어란 상상 속의 존재도 그랬다. 피에 굶주리고 남을 해쳐야만 살 수 있는 낙인찍힌 것과 흡사한 ‘괴물’이다. 하지만 딱히 다른 답도 갖지 못한 존재의 삶이란 늘 쫓기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사실 뱀파이어 연대기를 집필한 앤 라이스의 작품 속 존재들도 좀 더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 반대급부로 잃어버린 것들과 지독한 공허함에 늘 시달린다. 인간이 고령이 되면서 겪게 되는 세대 차이와 단절, 도태의 감정이 몇 배로 더 증폭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살해당하지 않는 한 불로불사의 존재들인데도 불구하고 실제 생각보다 장수한 개체는 거의 없다는 설정이다. 대부분은 뭔가를 찾아 어느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 뱀파이어들 역시 그렇게 무색무취하게 연명하는 존재들이다.
거의 대부분의 대형 육식동물, 인간이 흔히 ‘맹수’라 부르는 존재들은 총화기의 발달 이후 인간이란 존재의 위협을 의식하고 그들이 덩치 큰 개체만 골라서 사냥한다는 것을 전승해왔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실제로 사냥당해서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체구를 줄이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찍히면 죽는다!’는 걸 학습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뱀파이어들도 그저 인간 세상에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섞여 살기를, 가능하다면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지내기를 소망하는 소수자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3_외로운 뱀파이어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판타지 축제
뱀파이어 선희의 거처는 텅 빈 폐공장 터. 몰락한 산업의 폐허에서 그녀는 재봉틀을 돌리며 지글지글거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철지난 노래를 듣는다. 그러다 가끔 외출해 어두운 도시의 밤거리에서 사냥을 한다. 선희의 사냥 장면은 블랙 코미디 요소가 다분하다. 먹잇감을 물색한 후 끈질기게 뒤쫓긴 하지만 고작 성인 어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의 힘에 불과한 선희는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기습하는 작전을 구사해야 한다. 해당 장면의 묘사는 공포보단 슬랩스틱에 가깝게 표현되는데 봉준호 영화 특유의 ‘삑사리의 미학’이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나날이 연속되던 중 어느 날, 선희의 오빠인 뱀파이어 호준이 나타난다. 그는 공무원 수험생 행세를 하며 고시원 생활 중이라 한다. 들키지 않으려 조심해 가며 살다보니 피 맛을 본지도 오래다. 그가 공무원이 되려면 인간이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아야 한다. 선희와 달리 호준은 세상에 섞여 지내려 노력하지만 정작 그가 사는 고시원은 지독하게도 비인간적 공간이다. 사람 몇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거라며 그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수다를 떤다.
선희는 호준에게 말이 너무 많다며 핀잔을 주지만 그의 방문이 싫지만은 않은 듯 보인다. 재봉틀에서 자신이 하던 작업이 완성되자 선희는 기이한 한밤의 축제를 벌인다. 파티에 초대된 이들은 선희가 사냥했던 인간들이다. 열심히 미싱을 돌려서 만든 가면을 쓰자 그들은 일어나 선희, 호준과 함께 춤을 춘다. 친구가 없으면 대용으로라도 만들어내는 셈이다. 해당 장면에서 뮤직비디오 풍의 비주얼 이미지가 감독의 운치 넘치는 선곡과 어우러져 밤의 야회, 소외된 자의 무도회를 연출한다. 영화의 판타지 성향은 여기에서 정점에 달한다.
잠시 암전 후 장면이 바뀐다. 흑백으로 내내 진행되던 화면은 컬러로 변한다. 관객의 시야는 온통 환한 대낮의 질감으로 바뀐다. 선희는 미화원 복장을 하고 화장실 칸에서 잠깐 졸았던 것처럼 부스스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다시 일하기 전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입술을 살짝 벌린다. 이빨이 서서히 드러난다. 선희가 살짝 미소를 짓는다.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져 간다.
4_판타지를 통해 접근한 도시의 소수자들 풍경
이제까지 스크린에 펼쳐졌던 기괴한 이야기는 그저 고단한 현실을 잊기 위한 그녀의 꿈이었던 걸까? 실제라면 호준과 선희가 바랬던 인간사회로의 동화가 조금은 더 진전된 걸까? 영화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자료를 검색해 봤으나 지역에서 만들어진 단편영화 관련 정보는 거의 없었고 몇 개의 인터뷰 내용은 서로 상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전자라면 영화 속 주인공은 현실의 소외에 지쳐 일탈을 꿈꾸는 우리 주변의 기억되지 못하고 잊힌 노동의 얼굴일 것이다. 그리고 후자라면 마침내 들키지 않고 백년 넘게 걸려 인간사회에서 무색무취한 삶을 회복하게 된 소수자의 성공담일 테다. 고단하지만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원래의 삶인 셈이다. 하지만 굳이 심각한 정치사회적 해석을 동원할 필요 없이 그저 각자의 해석에 따라 작품을 소화해 즐기면 될 일이다.
선희와 호준 역 외에는 몇 명 안 되는 출연진은 거의 제작진과 지인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 본 작품의 제작과정은 곧 지역 독립영화 모델의 전형적 예시가 될 테다. 인상적인 음악 역시 감독의 대학 동기가 작업했고 심지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한영애의 목소리로 익숙한 ‘누구없소’의 색다른 버전을 감상할 수 있다.
그렇게 제한된 예산과 조건 아래 최소한의 스태프와 자원으로 만들어졌지만 한계를 감안한다면 천편일률적으로 양산되는 영화학과 전공 제출용 작업들에 비해 참신하고 파격적인 구석이 많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이 품고 있는 독특한 영화 속 풍경과 비전은 단선적 결과물로 그치는 게 아닌, 변경의 작가가 독창적 예술품으로서의 야심과 비전을 선보인 한 사례로 충분히 넘치는 매력을 발산한다. 이제 완성된 지 몇 해가 지나 ‘유통기한’은 거의 종료되었다지만 가끔은 꺼내서 다시 보고픈, 색깔 또렷한 단편영화다.
<작품정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Nobody Knows
2017|한국|판타지|17분
감독 황 영
주연 백규나(뱀파이어 선희), 임호준(뱀파이어 호준)
출연 김용삼(업어주는 남자), 박신희(여고생 은지), 문경영(어부바 커플 1),
전상진(어부바 커플 2), 고현석(경비원), 이다운(시체1), 박철형(시체2),
옥진주(시체3), 권진애(시체4)
연출부 권진애
촬영 전상진
조명 고현석
제작부 박철형
미술 분장 옥진주
녹음 이다운
음악 황현호
편집 김은영
2017 18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
2017 9회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블러디 나잇
2018 19회 대구단편영화제 특별섹션
2019 독립영화 반짝반짝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