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북 경주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군인과 경찰에 집단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72년 만에 이뤄졌다.
2기 진실화해위, 경주 국민보도연맹으로 희생된 29명 진상규명 결정
1950년 7월~9월 군경에 끌려갔다 집단 희생당해
희생자 대부분은 비무장 민간인…10대도 2명 포함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정근식)는 5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에서 제36차 위원회 회의를 열어 ‘경북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과 ‘최루탄에 의한 실명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은 2기 진실화해위 출범 이후 두 번째로 진상규명 접수된 사건이다.
‘경북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은 1950년 7월 초부터 9월 초 사이에 경북 경주에서 비무장 민간인 29명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 등으로 예비검속되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경주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강동면 주민들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사상범 전향을 명목으로 결성한 관변단체로, 대부분 정부의 강제적·폭력적 행정집행 절차를 거쳐 가입당했다. 애초 좌익 경력자가 주요 가입대상이었으나, 좌익 관련자뿐만 아니라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는 물론 무고한 국민들도 상당수 가입했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불법구금을 당하고, 학살당하기도 했다.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거나,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경주경찰서 및 각 지서 등에 구금됐다. 이후 이들은 경주경찰서와 육군정보국 방첩대(CIC) 경주지구 파견대에 의해 경주지역의 내남면 틈수골·메주골, 천북면 신당리·동산리, 양남면 구만리·입천리·장항리, 울산 강동면 대안리 계곡 등에서 집단 살해됐다.
희생자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 20~30대 남성으로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10대 2명, 여성 1명이 포함됐고, 희생 시기는 7월과 8월에 집중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군과 경찰이 비무장·무저항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법적 근거와 절차도 없이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절차 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위령비 건립 등 위령사업 지원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72년 만에 아버지 죽음 진상규명받은 조희덕 씨
삼촌이 보도연맹 가입했다고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
1960년 유족회 활동하다 5.16쿠데타 이후 끌려간 어머니
진상규명돼도 국가의 배·보상은 민사소송 제기해야
피해자의 국가배상청구권 소멸시효 배제 입법은 아직
이번 진실화해위 결정으로 조희덕(79) 씨도 아버지 조인환(1950년 당시 32세) 씨가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결정을 받았다. 조 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활동을 적극 참여해왔다. 기자와 전화에서 조 씨는 “지금이라도 이렇게 결정이 나오니 감사하다”며 아버지가 끌려갈 당시(조 씨는 7살) 기억을 또렷하게 설명했다.
“음력 6월 20일, 강동지서 순경이 찾아와 삼촌 이름을 불렀어요. 삼촌은 보도연맹에 가입했었고,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신했거든요. 집에 없다고 하니 아버지를 데리고 갔어요. 걱정할 것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6월 22일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조희덕 씨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경주에서는 그해 9월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했다. 조희덕 씨와 그의 어머니 이종덕 씨는 1960년 11월 13일 경주에서 열린 양민피학살자 경주지역 합동위령제에 참석했다. 하지만 유족회 활동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경주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핵심 간부를 포함한 전국의 피학살자 유족회 대표들이 ‘혁명재판’에 회부되면서 중지됐다.
“어머니가 위령제 당시 제문을 읽었어요. 고등학생이던 저는 조사를 읽었고요. 이후 5.16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어머니도 순경에게 끌려갔어요. 4개월 동안 구금을 당했다가 나오셨어요. 그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폭행을 당했던 어머니는 5년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한 맺힌 일 아닙니까.”
진살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이 됐다고 그동안 당했던 물질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이나 보상이 바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진상규명한 유족들이 직접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벌여야 한다.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 1기 활동 당시에도 진상규명이 이뤄지면 배·보상을 할 수 있도록 입법권고를 했다. 권고 가운데 일부는 받아들여 위령탑 건립과 위령제 예산 지원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 이후 배·보상 입법은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있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 배제를 담은 진실화‘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법률 개정안이 6건이나 국회에 발의됐으나,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서 멈춰 있다.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