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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인권은 횡단보도다. 도로 곳곳에 있지만, 그 존재의 중요성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횡단보도. 하지만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 위에선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할 공산이 크다. 노인이나, 장애인, 아이들. 횡단보도 없는 도로 위에 섰다간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 선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조례를 통한 인권의 제도화는 우리 사회에 촘촘한 횡단보도를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넘치고, 왜곡에 대응하는 사이 본연의 역할을 놓쳐가는 모습도 보인다. <뉴스민>은 전문가와 인권운동가, 시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횡단보도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인권조례, 횡단보도] ① 인권조례는 인권을 지키고 있을까
[인권조례, 횡단보도] ② 대구·경북 인권조례는 어디까지 왔나?
[인권조례, 횡단보도] ③ 복지시설에 갇힌 대구시 인권옴부즈만
[인권조례, 횡단보도] ④ 성희롱 시정 조치와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의 차이
[인권조례, 횡단보도] ⑤ ‘인권’‘조례’가 나아갈 방향은···?
<뉴스민>이 인권조례 문제를 대구·경북의 더 나은 10년을 위한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그 중요성에 비해 논의의 폭이 넓혀지지 않고 갇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권’이 마치 특정 집단에 한정돼 실현되는 듯 보이면서, 권력 기관이 구체적으로 인권을 체화해 권력 행사에 반영한다는 본연의 의미는 퇴색됐다. 정치 세력과 시민사회도 조례 제정에 매몰돼 공회전하고, 겨우 제정된 조례도 하나같이 있으나 마나 한 수준에 그쳤다. 헌법 만큼이나 추상적인 조례는 대구·경북에서 권력 기관의 알리바이로만 작동하는 모습이다.
뉴스민이 만난 지역의 인권운동가나 전문가들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는 “인권조례가 제정돼 규범화는 됐지만 행정에선 다르게 사용된다. 오히려 조례가 알리바이 역할을 하는데 그칠 개연성도 있다”고 말했다. 백경록 대구의정참여센터 운영위원장도 “조례를 만들어놓고도 4개 지자체 정도가 조례를 지키지 않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도 안 받는 게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창호 활동가는 대구시가 처음 구성한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에 참여해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백경록 위원장은 인권옴부즈만 초대 자문위원을 지낸 적 있다. 이들은 대구시의 인권 관련 위원회 활동을 하며 대구시에서 인권이 액세서리처럼 활용되는 걸 목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0년 인권보장 및 증진 조례 개정 작업이다.
대구시는 사회복지시설로 제한된 인권옴부즈만의 권한을 시민 일반으로 확대하면서 인권보호관으로 바꿔 운영하는 조례 개정을 준비했지만, 혐오단체의 반발을 넘어서지 않았다. 입법예고 단계에서 혐오단체 항의가 이어지자 의회에 안건을 상정하는 것을 보류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서 활동가는 인권위원직을 사퇴했다. 다른 위촉직 인권위원 8명도 함께였다.
서 활동가는 “사실 당시 개정안도 우리가 제안한 개정안에 비하면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인권영향평가 도입과 인권센터 설립을 담으려고 했는데 일반적 수준에서 그쳤다”고 설명했다. 백 위원장도 “자문위원회는 역할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인권옴부즈만도 조례 개정이 없으면 유명무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말했다.
“행정이 인권 기반 활동할 지역 인권 보장 체계 구축”
“의원 역할이 조례 제정에 멈춰선 안 돼”
“조례 제정 과정의 논란이 인권 의식 높이는 과정”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데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실효적인 인권의 제도화’에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리 표현했다. 서창호 활동가는 ‘지역 인권 보장 체계’ 구축을 인권 조례의 역할이자 제도화의 모습으로 설명했다.
서 활동가는 “대구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리 신장을 위해 직접 투쟁을 통해 풀어가는 방식의 역사가 깊다. 행정이 사회적 약자의 권리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까 직접 물리적 투쟁을 통해 행정을 견인하는 과정이 있었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소수자 활동이 발달돼 있는데, 이런 상황과 조건에 맞춰 인권조례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인권 행정이 제대로 뒷받침되는 지역 인권 보장 체계까지 가야 한다. 대구 행정에 끊임없이 인권 기반 활동을 할 수 있게 문제제기하고 담아내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며 “이런 논의 구조가 지역에 만들어져서 사회적 요구나 지역사회 인권 의제에 대한 시너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백경록 위원장은 입법에만 그치는 의원들의 추가적인 역할을 특히 강조했다. 백 위원장은 “조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의원들이 있는 당에서도 자기가 있는 지자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분노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며 “그렇게 보면 조례가 몇 개 있고 없고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의원들이 조례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건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다. 의원들은 상당히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견제와 감시도 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정책도 해야 한다”며 “인권 조례에 관심 있는 의원이라면 조례에 따라 인권 교육을 하는 현장도 찾아가 보고 해야 하는 거다. 조례를 만든다고 해서 일을 다 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인권 조례 제정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논쟁 자체를 중요한 의미로 짚는 의견도 있다. 김승무 인권실천시민행동 대표는 “조례를 제정할 때 논쟁하는 과정이 인권 의식을 높이는 과정”이라며 “제정 여부보다 중요한 건 그런 과정을 통해 의회든, 단체장이든 많은 시민에게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정된 후에는 실제 적용되는 건 좀 미미하다. 실제로 지역에서 인권이 구현되기 위해선 지역 인권위원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된다. 조사, 상담, 권고 같은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포괄적 규범화 잦으면 인권의 예절화 우려
개별적 이익과 권익에 복무하는 인권 운동 필요
“같은 문제의식 동조하는 건전한 다수 만들어가야”
반면, 자칫 포괄적인 성격의 조례 제정이 잦아지면 인권을 ‘예절화’하고, 인권이 기능해야 하는 상황에서 희화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있다. 포괄적인 규범화 대신 사회적 약자들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권익의 문제에서 조금씩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 인권을 더 실현하는 방안이라는 거다.
김해원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지 않느냐, 인권 친화적 풍토가 조성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인권이 과잉되면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한다고 본다”며 “첫째는 인권이 예절화된다. 인권은 공권력의 의무인데, 예절화된다면 과거 법치를 강조하던 군부 정권이 법치를 준법화한 것처럼 권력 기관이 시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인권이 예절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더 큰 문제는 적재적소에 인권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인권이 희화화되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권도 다른 가치들과 경쟁하고 충돌하는 가치 중 하나인데, 인권이 과잉화되면 모든 곳에서 원용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그러면 인권에 대한 환멸 같은 문제가 다른 전선에서 불거지고 그 전선에선 인권이 싸워 이길 수 없어진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적재적소에 필요할 때 그 칼을 휘둘러 문제 있는 곳을 도려내며 약간의 존엄을 확보해 나가면서 삶의 진보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며 인권 운동의 방향이 조례와 같은 포괄적 규범을 만드는 것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기본적인 인권도 보호받지 못하는 당사자에게 ‘약간의 존엄’을 확보하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때문에 차별금지법처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규범화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김 교수는 “맞다. 하지만 세상은 한 방에 해결되어 오지 않았다”고 답했다.
김 교수는 “세상을 한 방에 해결하겠다는 것, 할 수 있다면 좋은데 세상은 그렇게 안 바뀌어 왔다”며 “예를 들어 장애인 인권 투쟁은 점진적인 투쟁으로 경사로 하나를 만들었다. 이런 게 인권 운동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같은 문제의식에 동조하는 건전한 다수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인권이 민주주의와 소통하고 만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성소수자의 구체적 이익과 권리에 복무하는 운동이 더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동성 간 혼인이 가능하도록 법을 제정한다든지 하는 운동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 보니 한방에 퉁쳐서 포괄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 당사자는 삶의 절박한 문제이겠지만, 결합된 전문가, 활동가는 그것이 구체적인 삶을 견인할 내용이 담겨 있지 않고 오히려 위협할 가능성이 많은지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원, 장은미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