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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인권은 횡단보도다. 도로 곳곳에 있지만, 그 존재의 중요성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횡단보도. 하지만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 위에선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할 공산이 크다. 노인이나, 장애인, 아이들. 횡단보도 없는 도로 위에 섰다간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 선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조례를 통한 인권의 제도화는 우리 사회에 촘촘한 횡단보도를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넘치고, 왜곡에 대응하는 사이 본연의 역할을 놓쳐가는 모습도 보인다. <뉴스민>은 전문가와 인권운동가, 시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횡단보도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인권조례, 횡단보도] ① 인권조례는 인권을 지키고 있을까?
인권조례 제정은 지역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중요한 정책 과제로 꼽히지만, 보통의 시민들은 필요성을 크게 체감하지 못한다. <뉴스민>은 창간 10주년 기획 보도를 준비하면서 인권조례 제정을 포함한 10가지 주제를 두고 지난 1월 대구와 경북 곳곳에서 시민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뉴스민>이 만난 대구·경북민 70명 중 인권조례 제정을 향후 10년 더 나은 대구, 경북을 위해 필요한 과제로 선택한 이는 4명에 그쳤다.
어쩌면, 지역에서 인권조례 제정이 번번이 좌절되는 이유는 인권운동가나 전문가에겐 중요한 이슈이지만 시민들에겐 크게 체감되지 않는 이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민들이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도의 중요성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괴리를 좁혀가는 노력이 인권조례 제정뿐 아니라 실효적 운영으로 나아가는 첩경일 거라는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인권조례는 헌법적 가치인 인권을 구체화해서 공권력의 행사를 인권에 기반하도록 제도화하는데 의미가 있다. 공권력은 비단 군대나 경찰, 검찰 같은 물리적 권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정기관이 행사할 수 있는 ‘공적 권한’은 때때로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권력’이다.
행정기관은 공적 권한을 이용해 재개발·재건축을 허가하고 철거민을 만들어낸다. 장애인 출입을 위해 설치한 경사로를 관할 지자체가 불법 적치물로 규정해버리면 도리 없이 철거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대해서도 시민 기본권 제한이 우려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공적 권한이 곳곳에서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현재의 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과 논쟁이 조례의 진정한 의미보단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자극적 언쟁으로 점철되어 간다는 점이다. 인권조례 제정에 열심인 인권운동단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있다. 때문에 소모적 논쟁을 하며 인권조례에 목을 매는 것이 인권의 구체화와 제도화에 이득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김해원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터뷰
“인권조례, 주민 인권 보장이 더 잘되는지 의문”
“기본적으로 모든 조례가 인권조례여야”
“인권조례 만든다면, 조례 인권 제한적 성격 성찰해야”
헌법학자인 김해원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본적으로 이게(인권조례) 통과되면 실제로 주민들의 인권 보장이 더 잘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있다”고 말한다. 광주에서 인권옴부즈만을 지낸바 있고,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한 김 교수는 “인권조례를 통해서만 인권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혹은 구현될 것이라는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인권조례의 의미를 짚기 전에 우선 헌법적 관점에서 인권의 의미를 짚어나갔다. 헌법은 상반 규범이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함께 이야기하고, 인권 보장 규범이면서 동시에 인권 제한 규범이기도 하다. 때문에 김 교수는 헌법 아래 개별 법률과 조례가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짚는다. 상반 규범으로 구성된 헌법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토록 하는 것이 개별 법률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때그때 변화무쌍한 헌법 현실 속에서 헌법의 추상성을 구체화하는 몫이 입법자한테 있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모든 국가 권력기관은 권리적 차원에서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존재들”이라며 “기본적으로 인권은 그 의무자가 국가다. 국가에 일정한 의무를 지우는 것이고, 따라서 인권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는 모든 조례도 다 인권조례여야만 한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쉬운 예로 형법을 들었다. 누구든 타인의 건강과 생명, 재산을 해하지 못하도록 국가에 의무를 지운 것이 형법이다. 누군가를 해한 사람을 형법에 따라 수사·재판하고 처벌하는 과정이 생명권, 건강권이라는 기본적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제도화된 과정인 셈이다. 형법을 인권법이라 부르지 않지만, 그 자체가 인권을 지키는 법률인 것이다.
김 교수는 “모든 규범에 인권적 가치를 구현하도록 하는 문제가 함께 있는 것”이라며 “그렇게 본다면 ‘인권조례’라고 해봐야 특별한 건 아니다. 단순한 사무 분장이나 권한 배분, 절차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조례는 인권적 가치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차적으론 해당 조례를 잘지키면 문제가 없다. 조례 집행을 잘 안해서 생기는 문제는 해당 조례 위반이니까 그것으로 실효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를 고민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김 교수는 행정기관, 특히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권이 구현되지 않는 건 명확한 지방자치 사무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분명한 권한과 실효적 행위가 담보된 조례가 잘 없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인권조례가 없어서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대구시 차원에서 인권이 잘 구현되었으면 좋겠다는 신념을 가진 의원들이라면 구체적인 여러 조례를 하나하나 조사해서 어떤 인권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개별 영역에서 마련하는 고민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며 “인권조례 뿐 아니라 모든 조례가 지방자치 사무에 대한 이해 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지에 대한 구분이 없으니 상징적이거나 선언적인 수준에 그친 것이 많다”고 말했다.
제대로만 운영된다면 기존 조례로도 충분히 인권 행정을 펼칠 수 있다고 보는 만큼 김 교수는 인권조례의 역할도 기존 조례가 갖는 인권 본연의 문제를 겨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모든 인권 보장 의무를 가진, 혹은 인권을 구체화하는 규범은 다른 한편으론 인권 제한적 성격을 갖고 있기 마련”이라며 “그러니까 그런 규범을 성찰하는 작업이 항상 필요하다. 각종 조례 자체를 인권적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권은 있는 규범을 잘 지키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규범 자체도 인권적 차원에서 성찰해서 인권을 침해하는 규범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작업을 해야된다”며 “민원인한테 어떻게 하고 등등 같은 문제는 기존 제도로 처벌하거나 징계하면 될 일이지 인권의 본질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김 교수는 고민 없는 조례 제정과 각종 위원회 남발이 오히려 인권을 훼손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권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옹호하는 듯 보이는 위장기관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시장이 각종 업무를 하는데, 위장기관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시 인권위원회는 시장이 위촉한다. 시장이 ‘저기(위원회)에 인권침해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했다.’ 이렇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있다”며 “시장의 권한 확대를 위한 하나의 위장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지는 늘상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구와 경북의 인권 관련 조례 제정 현황을 살펴보면 인권 침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후 그 수습책으로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는 조례가 제정되는 경우가 여럿 확인되기도 한다. 대구의 첫 인권옴부즈만으로 4년 임기를 마친 이명주 씨의 경우엔 그 폐해를 직접 겪은 산증인이기도 하다. <뉴스민>은 대구·경북의 인권조례 현황과 전문가, 인권운동가들과 인터뷰를 통해 인권조례의 현 주소를 짚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상원, 장은미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