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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의 입이 날로 거칠고 험하다. 대선 과정에서 그는 20대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하고, 세대포위론을 내세워 부모와 자식 세대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다. 선동과 혐오를 앞세운 극악하고 야비한 술책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준석의 그 입이 장애인을 향하고 있어 더욱 우려스럽다.
이준석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의 시위를 ‘비문명적 방식’, ‘불법’, ‘시민 볼모’ 등의 격한 표현으로 연일 공격하고 있다. 장애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도 모자라 비장애인과 대립하고 갈등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준석은 36세의 나이로 헌정 사상 최초 30대 최연소 제1야당 국민의힘 대표가 되었다. 대선 과정에서 그는 당무를 거부하고, 선대위원장을 사퇴함으로써 윤석열 후보와 대립 구도를 형성하여 자신의 당내 입지를 확보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런 연후에 그는 윤석열 후보에게 ‘대선 승리 비책’을 담은 비단주머니를 건넸다. 그 주머니에는 윤 후보가 젊은 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선거 전략 등이 담겼다고 한다.
그래, 좋다. 제갈공명을 흉내 내어 이준석이 비단주머니 세 개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고 하자. 만일 그 주머니 속에 남성과 여성, 나이와 세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고 갈라치기하여 한국사회를 혐오와 증오의 늪에 빠지게 함으로써 오로지 정권 창출과 유지를 위한 계책이 들어있었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부터 이준석은 여당의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8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국민의힘 김예지 국회의원과 안내견 조이가 함께 무릎을 꿇었다. 김 의원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므로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장애인의 정당한 요구를 비하하고 공격한 사람은 같은 당 대표인 이준석이다. 그런데 정작 당 대표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무릎 꿇은 이는 ‘장애인’ 김예지 의원이다.
이 장면은 몇 해 전 장애인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해달라며 무릎 꿇은 학부모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무릎 꿇고 호소한 지 2년여 만인 2020년 3월 강서구 서진학교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비장애인과 똑같이 자유롭게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세워 공부하고 싶다는데 왜 장애인과 장애자식을 둔 부모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사회적 약자들이 무릎을 꿇어야만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한국이 정상적이고 ‘문명’ 사회라면 어느 누구도 무릎을 꿇어서도, 또 누구를 무릎 꿇려서도 안 된다. 누가 무릎을 꿇거나 누구를 무릎 꿇리는 사회는 비정상적이고, ‘비문명’적이며 반문명적이다. 전장연 회원들이 주장하는 이동권 보장 요구의 어떤 내용이 ‘비문명적’인지, 반대로 이준석이 말하는 ‘문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준석은 하버드 대학 출신이라는 배경을 내세워 화려하게 정치계에 입문했다. 미국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어 있다. 미국 지하철은 승강장과 폭이 좁고 턱이 없어 장애인이 휠체어로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중교통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니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이준석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왜 그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볼모’로 혐오정치를 하려 하는가. 혹시 그는 ‘꼬마 트럼프’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에게 패하여 재임에 실패했다. 비록 대선에는 졌지만 바이든과 근소한 표 차이로 진 탓인지 미국인의 절반 정도는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다. 미국사회는 아직도 ‘트럼프주의’ 혹은 ‘트럼피즘’이 남긴 후유증으로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다.
트럼피즘이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과정과 그 이후 생겨난 혐오에 기반한 정치 현상을 말한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 남성우월주의(프라우드 보이즈), 반동성애주의(호모포비아) 등을 내세워 특정 집단을 매도하고 혐오하는 정치로 대중을 선동하였다. 심지어 대선에서 패배한 후에도 트럼프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이용하여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트럼피즘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2021년 1월 6일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가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트럼피즘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미국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에도 혐오정치는 숙지지 않고 있다. 이 기세에 편승한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벌써 차기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트럼피즘이 미국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원인은 정치적 냉소주의와 무관심, 그리고 선정적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의 무책임성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또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등 미국이 앓고 있는 고질적 병폐도 트럼피즘 출현에 한몫했다. 정치권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인종과 지역, 빈부 격차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그로 인해 중하층의 백인 소외 계층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축소와 경제수준의 악화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트럼프는 이들의 불만 심리를 꿰뚫고 백인 우익과 빈곤층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트럼프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갈라치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하게 구축하였지만 트럼피즘에 빠진 미국 사회는 분열과 혼동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이준석의 정치적 언행과 행보를 보면, 그가 트럼프와 닮아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둘 다 달변가이자 능변가다. 그 걸쭉한 입담을 바탕으로 둘은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또한 둘 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SNS)를 능숙하게 운용하여 정치활동을 하는 점도 똑같다.
어디 그뿐인가. 트럼프가 부동산자본가로 미국인들의 물질적 욕망을 대변한다면, 이준석은 과학고를 나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는 배경으로 한국인들의 학벌과 신분 상승 욕구를 대리 충족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트럼프와 이준석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혐오와 배제를 정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준석은 공정한 경쟁을 입버릇처럼 내세우고, 누구나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출발선에 설 수 있어야 한다며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공정 경쟁은 성적과 같은 계량적 성과에 의거한 능력지상주의나 엘리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기회의 평등을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 조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인간이 사회공동체를 이루고 협력하며 공존하는 데 필요한 공동선과 연대는 그에게 일고의 가치가 없는 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정치에 입문하여 짧은 기간에 당권을 장악한 이준석은 애늙은이가 되어 기성 정치인보다 더 교활하고 영악한 정치기술을 습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선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을 ‘선거 중독자’라 일컬은 이준석은 “대선에서만 승리하면 여한 없을 것”이라며 정권교체에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정치 선배 입장에서 정치 초보 윤석열에게 ‘연습문제’를 내기도 했다. 삼국지를 너무 좋아한 탓일까? 그는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자신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馬)이나 졸(卒)로 보는 듯했다.
이준석에게 정치란 직업이다. 그런 그에게 정치판을 놀이로 생각하고 즐긴다고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사람과 사회를 대하는 그의 가치관과 태도다. 그는 화해와 협력, 대화와 소통, 연대와 상생과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이념을 버리고 배제와 소외, 증오와 혐오, 차별과 분열에 기대어 정치권력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트럼프와 같은 위험한 정치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준석은 지금 당장 ‘꼬마 트럼프 놀이’를 멈추어야 한다. 개인 이준석은 물론 정치인 이준석, 나아가 한국사회의 정치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채형복/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