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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음력 2월 23일, 예안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사는 김령金坽(溪巖, 1577~1641)에게까지 인조의 책봉사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음력 2월 6일 평안감사가 책봉사로 태감인 왕민정과 호양보가 온다는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는데, 그 사실이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예안고을까지 알려졌다. 인조 입장에서는 2년째 공을 들이고 있는 일이었으니 반갑기 이를 데 없었겠지만, 김령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세력들은 폐모살제廢母殺第(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를 명분으로 광해군을 보위에서 끌어 내리고 능양군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왕이 바뀌면 반드시 명明나라로부터 책봉 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비록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라 해도,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다하고 있는 이상, 명나라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으면 왕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탓이다. 특히 인조반정의 명분 가운데에는 명에 대한 사대를 게을리 했던 광해군에 대한 징벌적 성격도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대하는 명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인조반정 그 이듬해인 1624년 이덕형李德泂과 오숙吳䎘을 보내 왕의 책봉을 청했다.
책봉은 조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니만큼, 외교적으로 낮은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반정으로 옹립된 경우, 그 태도는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황제국 입장에서는 반정에 의해 옹립된 왕이나 급작스런 세자의 교체 등에 대해서는 그 이유와 명분을 확인한다는 이유를 들어 외교적 우위에 서려는 전략을 쓰곤 했기 때문이다. 책봉에 대해 미적대기 일쑤였고, 심지어 책봉 거부 의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청나라의 발호를 견제해야 하는 명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었고, 따라서 책봉사 파견도 큰 문제 없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김령의 걱정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책봉사라고 해도 외교관계에 둘 다 환관인 태감이 파견되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명나라 왕명 출납을 환관들이 담당하다 보니, 책봉사 역시 정사로 환관 가운데 고위직인 태감을 선정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부사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된 문관이 선정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명나라 환관들의 작태는 명나라 망국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될 정도였으니 말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그나마 문관인 부사가 외교적 체면을 이유로 심한 횡포는 막아 주곤 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태감들에게 작심하고 횡포를 부려도 된다고 권할 상황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2월인데도 조정은 벌써 부산해졌다. 국경을 넘어 한양에 도착하는 동안 지나쳐야 하는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의 감사에게 명을 내려 관사를 수리하고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판서급에 해당하는 김상용金尙容을 의주까지 보냈고, 한양에 도착한 이후에는 심열沈悅이 책봉사 관련 업무를 모두 맡기로 했다. 원래는 김류와 이정구가 각각 이 일을 맡기로 했지만, 사신으로 문관 출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대체한 결과였다. 조선과 명의 외교에서 중요했던 학문적 교류가 의미 없어졌다. 북쪽의 삼도三道 백성들은 길을 닦고 관사를 수리하는 요역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책봉사들을 접대할 물목들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세도 전국으로 할당되었다. 특히 책봉사들에게 줄 예물 준비는 그 양을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들 책봉사는 음력 6월 1일 개성부에 이르렀다. 아니나 다를까 환관으로 이루어진 책봉사는 팔자를 고치기 위해 작정한 듯했다. 6월 1일 개성부에 도착하자마자 개독례開讀禮(황제의 칙서를 읽어 주는 의례로, 광해군 책봉 때부터 이를 빌미로 예물을 요구했다)를 명목으로 예물을 요구했고, 은 1만 2천 냥을 받아 갔다. 15년 전인 광해군 책봉시 개독례를 명목으로 은 5천 냥을 준 것보다 2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도 적다고 툴툴거려, 한양에 도착하면 더 주겠다고 달래야 했다. 음력 6월 3일 한양에 도착한 책봉사들은 황제가 내린 조서와 칙서를 통해 왕과 왕비가 정식으로 책봉되었음을 알렸다.
음력 6월 4일에 왕이 사신들에게 예단을 내렸는데, 이들은 적다고 화를 내면서 연회 음식을 엎어 버렸다. 결국 이튿날 호조에서 은과 인삼 등을 넉넉하게 준비하여 별도 예단 명목으로 건넸지만, 이들의 화를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예물을 더 거두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사용했다. 명나라에서 올 때 그들은 작은 예단을 준비해 와서 이를 이리저리 보낸 뒤 그에 대한 답례를 요구했다. 오죽하면 실록에 “장사치들이 이익을 다투는 것처럼 원래 가격의 배를 받으려 한다”라는 기록이 있었을까? 이렇게 거두어들이면서도 자신들이 받는 예물이 적다면서 화를 내고 통역관 및 접반사 등에게 패악질을 부렸다. 이렇게 그들은 매일 거의 1만 냥 가까운 사례와 2백 근 가까운 인삼을 챙겼다.
책봉사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호위하는 하급직들까지 챙겨야 할 대상도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환송 연회에서 인조마저 자신이 아끼던 보검을 빼앗겼다. 이들은 돌아갈 때도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물을 건너는 곳에 다리가 없으면 무교가無橋價(다리가 없는 곳을 건너는 데 드는 비용)라는 명목으로 은을 받았는데, 지나가는 고을마다 재정이 거덜 났다. 또한 그들은 개성부에 은자 5천 냥으로 인삼 5백 근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고, 개성부 백성들이 이를 부담하다가 “중원에 이런 큰 도적이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라고 길에서 울부짖을 정도였다.
왕이 바뀌면 조선은 늘 책봉을 요구해야 했고, 책봉사들의 횡포는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그나마 명분에 문제가 없는 왕위 계승에는 책봉사의 횡포도 그리 크지 않았고, 책봉도 상대적으로 덜 급했다. 이에 비해 왕위 계승의 명분이 약하거나 반정을 통해 오른 왕일수록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한 책봉 필요성은 더욱 컸고, 이 사이를 비집고 책봉사들의 횡포도 커졌다. 외교적 약점을 쥐는 순간 그들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외교에서 명분이 약하면 그 비용은 세질 수밖에 없는 법이고, 그 부담의 크기는 오롯이 백성들의 몫이다. 외교라는 시장에서 지도자의 떳떳함이야말로 그래서 가장 큰 가치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