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분노 그리고 복수 그 정당성에 대하여, ‘더 배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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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코믹스> 슈퍼히어로 배트맨의 영화화는 다소 부담스럽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의 작품성과 인기 때문이다. 3부작은 유치한 오락 영화에 머문다는 세간의 인식을 깨뜨려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로 평가받는 데다, 슈퍼히어로의 지향점을 제시한 탓에 슈퍼히어로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늘 비교된다. 3부작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 전개와 현실성이 있는 장비, 코믹스의 깊이 있는 재해석으로 아직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다크 나이트(2008년)>는 슈퍼히어로라는 장르를 넘어 걸작이란 평가를 얻었다.

때문에 <더 배트맨>은 놀란 감독의 3부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2020년 3월 콘셉트가 공개됐을 때에는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에 비해 빈약하다는 평이 많았다. 3부작의 배트맨 슈트와 배트모빌, 배트윙의 위용이 압도적인 탓이었다. 이에 비해 신작의 배트모빌은 포드사의 머스탱이 떠오르는 머슬카 형태이고, 배트맨 슈트도 클래식하다. 온라인에는 대부호가 중산층이 된 것 아니냐, 튜닝 동호회 튜닝카, 개성이 없는 배트맨이라는 조롱 섞인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더 배트맨>의 예고편과 상세한 콘셉트가 공개되면서는 우려가 기대로 바뀌었다. 특정 악당의 음모를 저지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암울한 누아르의 탐정으로 배트맨을 묘사한 덕분이다. 원작에서 배트맨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다. 천재적 지능과 불굴의 정신력, 전술, 전략의 달인이고, 극한까지 단련된 신체로 곡예에 가까운 무술을 펼친다. 근접 무기와 총기도 잘 다룬다. 배트맨은 이러한 능력을 통해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 활동한다. <더 배트맨>은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따른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느껴진다.

선거를 앞둔 핼러윈에 5선에 나선 고담의 시장이 살해된다. 배트맨으로 정체를 감춘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은 경찰들의 냉대 속에서 고든 경위(제프리 라이트)의 도움으로 살인 현장을 조사한다. 브루스는 배트맨이 된 지 2년째다. 밤마다 신출귀몰한 자경단 활동을 벌여왔지만, 경찰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범죄자들을 은밀히 처벌해온 배트맨은 살인은 하지 않지만 꽤 잔혹하다. 자신을 복수라고 칭하며 범죄자들을 매섭게 응징한다. 웨인가의 도련님으로선 칩거한다. 덕분에 배트맨에 관한 소문은 유령처럼 환상처럼 나돈다.

그런데 살인 현장에서 얼굴을 가린 범인 리들러(폴 다노)는 배트맨을 겨냥해 단서를 남겨놓는다. 배트맨은 리들러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단서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실종된 친구를 찾는 캣우먼 셀리나 카일(조이 크라비츠)을 만나 공조한다. 둘은 고담 최대 마피아 조직의 두목 카마인 팔코네(존 터투로)와 부하 펭귄(콜린 파렐)을 추적해 고담시에 얽힌 비밀과 살인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리들러는 배트맨이 사건을 추적하는 동안에도 부패의 카르텔인 정치인·검사·경찰들을 잇달아 살해하며 배트맨에게 수수께끼를 남긴다. 배트맨은 리들러를 추적할수록 부모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고뇌에 빠진다.

<더 배트맨>은 <양들의 침묵(1991년)>이나 <세븐(1995년)> 등과 같은 범죄수사극에 가깝다. 배트맨이 탐정처럼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을 만나고 퍼즐을 풀 듯 사건을 해결한다. 배경은 역대 배트맨 영화 중 가장 어둡고 음울하다. 도시 곳곳은 음습하고 화면은 시종 밝지 않다. 공권력은 부패했고 온갖 범죄가 판친다. 도시의 숙원으로 여겨지던 재개발 사업을 둘러싸고 구조적 부패 속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희망을 걸어볼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도시에서 배트맨은 추적과 처단에만 골몰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몰락하는 건 자신이다. 부모가 살해당한 트라우마와 범죄자에 대한 분노에 빠진 배트맨은 부모에 대한 복수냐, 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한 정의냐를 두고 성장통을 겪는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짙고,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는 희생의 영웅상을 그렸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다른 히어로들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배트맨을 표현했다. 탐정의 성격이 강한 맷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은 새로운 배트맨 영화다. 기존 배트맨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펼쳐 보이는 덕분이다. 기존 <배트맨 시리즈>에서 보여준 슈퍼히어로의 강점은 뚜렷하지 않지만, 범죄수사극의 묘미는 짙다. 무자비한 맨몸 결투 장면이나 자동차 추격전은 박진감이 넘친다. 특히 배트맨과 배트모빌의 첫 등장은 긴장감이 매우 강렬하다. 안티 히어로는 호러물의 악마처럼 어둠과 화염을 뚫고 나타난다.

<더 배트맨>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불호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176분에 달해 지루하고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무겁다는 것이다. 반대쪽은 원작 코믹스를 제대로 영상화했다며 열광한다. 누아르풍 수사물로서의 매력을 극대화한 게 한몫했다. 절대선의 상징인 토마스 웨인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 토마스는 유명한 의사이자 박애주의자, 자선사업가다. 또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전 회장으로 고담시를 정상적으로 만들어 보려는 이상을 가진 대부호다.

<배트맨 비긴즈(2005년)>에서는 라스 알 굴(와타나베 켄)이 이끄는 리그 오브 쉐도우가 고담시를 심판하기 위해 경제를 무기로 공격하는데, 당시의 공황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을 환원한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도산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더 배트맨>에서 토마스는 완벽한 선이 아니다. 그 역시 팔코네와 펭귄의 범죄와 연관되어 있다. 브루스는 부모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을 겪는다. <조커(2019년>에서 그린 토마스 웨인 역시 절대선은 아니지만, <더 배트맨> 속 토마스는 ‘좋은 재벌’의 환상을 깨트린다.

<더 배트맨>은 ‘복수’라는 행위와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고뇌한다. 브루스는 요절한 부모에 대한 복수심으로 도시의 악당을 처단한다. 분노는 복수를 실행하기 위한 삶의 동력이다. 셀리나 카일 역시 실종된 친구를 찾기 위해 캣우먼으로 활동한다. 사적인 복수를 하려는 셀리나를 배트맨이 막는다. 그러나 배트맨의 복수 역시 셀리나의 복수와 크게 다르진 않다. 위정자의 추악한 이면을 알게 된 악당 리들러는 고담시의 음모를 파헤치고 배트맨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셀리나와 동행하고 리들러를 추적하는 배트맨은 자신이 공적이라고 믿는 복수와 분노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분노에 휩싸여 복수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현실도 영화처럼 사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만인에 평등하다는 법은 빈틈투성이다. 사회 질서를 지켜야 할 사법기관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위정자들의 속내는 영달을 달성하는 데만 치중한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공분은 그릇된, 뒤틀린 처벌 의식을 낳는다. 다소 가벼운 처벌을 받은 가해자를 직접 처단하겠다는. 가해자의 가족 신상까지 털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자경단이 활개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복수와 분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