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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해 정부는 인구감소지역 89곳을 지정했다. 89곳 중 16곳은 경북이다. 경북은 전남과 함께 가장 많은 곳이 인구감소지역으로 꼽혔다. 대구도 안전하지 않다. 남구와 서구가 인구감소지역에 이름을 올렸다. 감사원이 지난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47년이 되면 대구 모든 구·군이 소멸(고)위험 단계에 접어든다. 시민들도 이를 장래에 다가올 가장 큰 위협으로 주목하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미래, ‘인구소멸’은 우리를 막다른길로 몰아넣고 있는 걸까?

① “상가는 내놔도 팔리지 않고, 학교도 없어지잖아요”
② 고령화X고밀도=소멸?
③ 다 아는 이유, 떠나는 청년들
④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곳

“우리 집 앞에는 나무가 있다. 아버지께서 그 나무는 수호신이라고 했다. 이백 년을 넘게 우리 마을을 지켜왔다고 한다. 나는 그 큰 수호신 나무가 지켜준다니 정말 안심되었다.” _ 이명, <우리 마을 자랑> 중

2009년 10월 24일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 안계면사무소.

올망졸망 초등학생 10명이 줄지어 섰다. 차렷 자세. 조금은 긴장한 표정. 그 줄 가장 앞에 안계초 5학년 이명(가명) 학생이 섰다. 학생들 뒤로 마련된 의자에 그의 아버지도 자리했다. 한 손에 꽃다발을 들었다. “대상, 안계초등학교 5학년 이명. 위 어린이는 2009년 안계사랑 어린이 공모전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였기에 상장과 부상을 수여합니다” 난생처음 1등상을 받은 딸에게 아버지는 꽃다발을 건넸다.

송종대(55, 당시 42) 씨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계면으로 이주해온 지 6년차, 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내가 안계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마을의 아름다움과 살기 좋은 마을이 무엇인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짓게 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까지 했는데, 내가 마을을 떠나선 안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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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안계면

서남쪽으로 위천을 끼고 광활한 안계평야가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경북 의성 안계면. 지리적으론 경북 중심에서 동서로 길게 자리한 의성은 동쪽으로 의성읍, 서쪽으로 안계면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안계면은 조선시대에는 역참이 있어서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시험을 보러 가면 거쳐 갔고, 일제강점기부터 영남에서 길러지는 종모우가 이곳에서 거래됐다.

현재도 28번 국도가 통과하고 여러 군도가 교차하며, 멀지 않은 곳에 서의성IC를 통해 당진영덕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어서 사통팔달 연결된 교통의 요지다. 하지만 영남의 선비들이 이곳을 거쳐 한양으로 떠나갔듯, 사통팔달로 연결된 이곳을 거쳐 수많은 의성 사람들이 떠나갔다.

1949년 해방 후 처음 이뤄진 인구조사에서 의성 인구는 17만 4,883명, 1966년에는 20만 명도 넘긴 적이 있다(20만 3,753명). 산업화 진행과 함께 의성 인구도 시나브로 빠지기 시작했고, 1990년 인구조사에선 10만 명이 무너졌다. 이제는 5만 명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안계면도 1949년 1만 명이 넘는 이가 살았지만(1만 2,913명), 2020년 기준으로 수준(4,585명)으로 줄었다.

송종대 씨는 많은 의성 주민이 고향땅을 떠나고 있을 때 이방의 땅에 발을 들였다. 2003년, 안계면 인구는 5,831명. 경남 합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종대 씨는 36살 나이로 5,831명 중 1명이 되었다. 그해 4월 종대 씨는 안계면에 자리를 잡았다. 안계면 교촌리에 버려진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농촌체험 시설로 탈바꿈하는 사업이 진행됐고, 관련 전문성이 있던 그가 초빙된 것이 계기가 됐다.

종대 씨가 의성에 정착할 그즈음, ‘의성 토박이’ 장은주(39, 당시 20) 씨는 매일 아침 안동으로 긴 ‘통학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2002년 안동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은주 씨는 1년 만에 기숙사 생활을 접었다. 되돌아온 집은 포근했고, 엄마가 해주는 밥은 맛있었다. 대신 은주 씨는 늦잠을 포기해야 했다. 매일 아침 학교에서 운행하는 통학 버스는 예천을 거쳐 의성으로 왔다. 오전 7시 30분을 전후해 은주 씨는 같은 선택을 한 ‘동지’ 대여섯 명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은주 씨네는 오랫동안 의성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님 이전 세대부터 의성읍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정말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그래서였을까, 고향땅을 사랑하는 그는 의성을 떠난다는 걸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잠시 타지 생활을 했지만 이내 되돌아와 고된 통학 생활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구미와 안동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의성에서 출퇴근을 고집했다. 지난해 의성작은영화관장으로 오기 전까지 근 2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20년의 삶이 수월하진 않았다. 친구들에 비해 일찍 결혼한 그는 스물여덟이 되던 해 아이를 낳았다. 2011년, 의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의료시설도 없는 실정이었다. 그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북의 도시는 의성 뿐이 아니었다. 인근 군위와 예천, 영덕, 청도, 고령, 성주, 영양, 봉화 등 9곳에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가 없었다.

의성처럼 1시간 이내에 분만 가능한 의료기관이 없고, 가임여성인구비율이 30% 이상인 지역을 분만취약지로 분류한다. 정부는 같은 해 분만취약지 지원 사업을 실시하면서 예천을 시범사업수행 지역으로 선정했다. 예천의 산부인과는 그해 7월 문을 열었지만, 은주 씨는 차로 1시간을 달려 안동까지 가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출산을 하려면 안동으로 가야 했죠. 가장 가까운 곳이 안동이어서 안동으로 갔구요. 못 미더운 친구들은 대구 칠곡(북구) 쪽에 가서 출산을 했어요. 빈도를 따져보면 ⅓은 안동, ⅔는 칠곡 인 거 같아요. 멀어서 미리 와서 입원을 하는 쪽으로 많이 권하거든요. 저는 집에 있다가 산통 시간 보고 준비를 해서 한 시간 정도 남편이 운전해서 병원에 갔어요.” 

아이가 크면서는 소아과가 걱정거리다. 의성에는 소아를 전문으로 보는 의사는 없다. 은주 씨가 어렸을 때, 그를 돌봤던 의사 선생님이 여전히 진료를 본다. 근 30년이다. 은주 씨는 그곳 대신 새로 생긴 병원에 아이를 데려간다. 그곳도 소아를 전문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의사가 진료를 본다는 게 좀 더 믿음이 가는 탓이다.

“의료기술이 훨씬 발전했으니까 제가 어렸을 때보다 나빠졌다고 볼 순 없을 거 같아요. 대신 병원은 많이 줄었어요. 소아과 전문의는 없구요. 정형외과, 소아, 내과 이렇게 다 보는 곳이 한 두곳 있고 그중에서 얘기들이 많이 가는 쪽에 가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급박한 상황이 있거든요. 열이 오르면 안동까지 가는 것도 진이 빠져요. 시설적인 면이 조금 아쉽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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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씨가 한창 통학 버스로 의성과 안동을 오갈 때 종대 씨가 맡은 사업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전국 곳곳에 비슷한 농촌체험마을이 만들어졌다. 당시 참여정부도 농촌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지시로 ‘도시민이 찾아오는 살기 좋은 농촌마을 만들기 TF팀’이 안계면을 찾기도 했고, 노 대통령은 2005년 충북 단양에 문을 연 농촌체험마을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정부는 농촌을 되살리는데 공을 들였지만, 현실이 녹록한 건 아니었다. 노 대통령이 충북 단양을 방문하던 해 종대 씨는 지역 소멸의 증거를 목격했다. 의성에 거주하는 초등학생 80명이 참여하는 건강 캠프를 운영했는데, 그때 순간적으로 진땀이 흘렀던 순간을 종대 씨는 지금도 기억한다.

▲송종대 씨는 2005년 농촌이 소멸하는 현실을 떠나려는 어린이들에게서 확인했다.

80명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종대 씨가 말했다. “앞으로도 의성에서 살 어린이는 손들어보세요.” 일순간 현장에는 적막이 흘렀다. 당황한 종대 씨는 질문을 바꿨다. “부모님이 농사짓는 어린이는 손들어보세요.” 절반 정도의 어린이가 손을 들었다. “그럼, 앞으로 농사 짓고 살 어린이는 손들어보세요.” 잠깐의 침묵, 이윽고 한 어린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 도시에 나가서 취직이 안 되면 농사지을게요.”

“의성 농업의 미래는 그 아이가 백수가 안 되면 농업의 대가 끊어지는 거예요. 애들이 농업이나 농촌에서의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는 거죠. 농촌에서의 어린이들도 잠재적 도시인이라는 거예요. 어린이와 청소년이 미래를 꿈꾸지 않는 농촌은 당연히 소멸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농촌’. 지역 소멸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꿈’은 바꿔말하면 이곳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라 지역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는 지역사회에서 그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의 문제로 직결된다.

종대 씨나 은주 씨가 의성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런 연유가 있다. 종대 씨는 2003년부터 맡아 하던 일이 좋은 생과를 냈다. 2010년에 그는 농촌체험마을 운영 터전을 닦은 후 손을 놓았지만, 이후에도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2013년 매일신문은 ‘귀촌 10년 세월이 그를 전국에서 손꼽히는 귀촌·귀농 전문 강사로 만들었다’고 그를 소개했다. 농촌체험마을을 만들어 운영하는 실무자에서 경험을 전달하는 교육자로 변모해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은주 씨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의성에 일자리를 마련하면서 구미, 안동을 오가며 출퇴근하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남편이 의성에 직장을 마련해 안착했다. 이제 은주 씨는 아이의 ‘꿈’을 고민하며 의성을 지키고 있다. 주변의 또래 부모들은 아이의 꿈을 위해 의성을 떠나고 있다.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던 아이들 중 일부는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안동으로, 대구로 떠났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한 학급 정도 되는 인원이 떠나갔다. 은주 씨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하기도 여러 번이다. 그럴 때마다 은주 씨는 흔들리는 마음을 남편과 대화를 통해 다잡는다.

“주변에 친한 언니, 오빠들이 가실 때 같이 가자고들 하셨죠. ‘여기선 희망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해서 교육을 어떻게 시킬래’ 그런 이야길 많이 했어요. ‘왜 아이를 방치를 하느냐’고도 했어요. 아이를 더 성장시키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을 만들려면 넓은 곳에서 경쟁시키고, 교육도 받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가치관 문제고, 우리 생각이 옳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 이야길 들을 때마다 흔들려요. 우리 부부가 선택한 삶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건 아닐까, 해마다 고민하는 문제이긴 해요”

▲장은주 의성작은영화관장은 매년 떠나가는 동료 부모들이 함께 떠나자고 할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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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삶과 이야기는 지역 소멸 문제의 근본을 건드린다. 단순히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들여 외지 청년 몇을 끌어다 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다. 아무리 많은 청년을 끌고 와도 또 그만큼의 청년이 떠나간다면 남는 건 또 다른 이탈 뿐이다. 문제는 대다수 지역 지자체가 지역 소멸을 해결하겠다며 제시하는 해결책이 아직 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⑤ 의성 이웃사촌시범마을이 ‘정말’ 성공하려면)

촬영 및 편집=여종찬, 박찬승 PD
취재 및 기사=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