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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한국형 코미디 신파물 <7번방의 선물>은 2013년 개봉해 누적 관객 수 1,281만 명을 모았다. 이 영화는 역대 한국영화 관객 수 3위에 올랐고, 코미디물 가운데 첫 천만 관객 영화가 됐다. 영화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엇갈린다.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볼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만, ‘눈물을 짜내는 플롯·연출’에 의존하는 졸작 신파라는 비판이 거셌다.
여섯 살 지능의 용구(류승룡)는 마트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한다. 월급은 67만 원에 불과하지만 일곱 살 난 딸 예승(갈소원)과 행복하게 산다. 용구는 어느 날 예승이에게 세일러문 가방을 사주려다가 살인 누명을 쓴다. 혼자 남은 예승은 보육원으로 보내진다.
용구가 들어간 교도소 7번방에는 흉악범들이 모여 있다. 용구는 위험에 처한 같은 방 방장 소양호(오달수)를 구하게 되고, 자신을 살려준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소양호에게 용구는 예승이를 데리고 오고 싶다고 말한다. 평생 죄만 짓고 살아온 7번방 재소자들은 용구의 딸 예승이를 교도소 내부로 데려와 보살핀다.
영화는 전반부까지 코미디에 주력하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는 비극적 죽음과 가족애 등에 집중한다. ‘교도소에 딸을 들여와 재소자와 만나게 한다’는 설정은 정교하지 않아도 관객을 기어코 울리기 때문에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평단의 반응은 <7번방의 선물>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적장애를 지닌 주인공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신파적 설정으로 슬픔과 억울함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눈물을 짜낸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7번방의 선물>은 한국영화 사상 8번째 ‘천만 영화’가 됐다. 홍보마케팅비를 합쳐도 총제작비가 58억 원(순제작비 35억 원)인 이 영화의 극장매출액이 720억 원을 넘었다. 제작비 대비 약 13배의 매출이다. 영화가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낸 까닭은 현실에서 부당권력에 의해 억울한 상황에 몰린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 공감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은 실화가 기반이다.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정원섭 목사는 지난해 3월 28일 별세했다. 고(故) 정 목사는 누명을 쓰고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1972년 9월 27일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한 논둑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역전파출소장의 아홉 살 딸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다. 만화방을 운영하던 소시민이던 그에게 난데없이 떨어진 비극이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고, 김현옥 내무부 장관은 “열흘 내로 범인을 검거하지 않으면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며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다. 경찰은 피해자가 만화방에 간다며 외출한 점과 피해자의 옷 주머니에서 만화방 TV 시청표가 발견된 점 등을 들어 정 목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수사과정에서 정 목사는 범죄 사실을 모두 부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은 시한부 검거령 마지막 날인 10월 10일 “정씨에게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발표했다. 밤낮없는 고문 끝에 거짓자백을 받아낸 것이다. 경찰은 정 목사 아들의 하늘색 연필을 압수해 연필이 마치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것처럼 증거를 조작하기도 했다.
1973년 3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 목사는 항소와 상고를 이어갔지만 같은 해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는 ‘강간 살인마’ 누명을 썼고 1987년이 되어서야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사회에 나온 뒤에도 결백을 호소했지만,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그의 절규를 외면했다. 정 목사가 누명을 벗은 건 일흔의 나이가 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법원 재심을 거쳐서다.
이후 정 목사는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경찰과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재심 무죄 확정 후 6개월 안에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였다. 정 목사가 지키지 못한 기간은 10일이었다. 단 10일이 지났다는 이유로 국가의 배상 책임을 묻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지나치게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전개는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현실에서 법은 불공평하고 공권력은 부당했다. 대중이 <7번방의 선물>에 환호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영화 속에서 위로받기 때문이 아닐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