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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여기 섰을 때도 엄청 추웠다. 오돌오돌 떨면서 발언을 했었다. 작년 3월 18일 ‘정유엽과 내딛는 공공 의료 한 걸음 더’라는 슬로건을 필두로 경산에서 청와대까지 380km의 도보 행진을 마치고 바로 이 자리에서 했던 외침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직 눈에 띄는 큰 변화와 성과는 없지만, 유엽이를 통해 조금씩 사회의 건전한 변화와 성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전진하고 있다.”
며칠째 비가 내리면서 마지막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19일 낮 2시, 경북 경산 남매지 야외공연장 무대에 정성재(55) 씨가 올랐다.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는 게 이제는 꽤 익숙하다. 지난해 3월 18일, 그는 남매지 무대에 서기 전, 청와대 앞에 먼저 섰다. 2월 22일 경산중앙병원에서부터 청와대를 향해 시작한 도보행진이 그날 마무리됐다.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고, 그게 안 된다면 시민사회수석이라도 만나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됐다.
청와대 앞에서 그는 “1년 전 유엽이가 우리에게 보여준 상황이 마음속 트라우마로 남았다. 하지만 유엽이의 억울한 일을 그냥 가슴에 묻고 한탄한다고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료시스템으로 인해 발생하는 아픔을 보며 우리 의료체계가 더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뜻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그의 아들 정유엽 씨가 코로나19 환자로 오인돼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떠난 지 2년째, 다시 그를 기억하는 친구와 가족, 시민들이 모여 추모제를 열었다. 이번 추모제는 유엽 씨 뿐 아니라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음에도 추모, 애도하지 못한 모든 아픔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연대하는 의미로 마련됐다. 무대는 유엽 씨와 다른 희생자 4명의 사연도 함께 꾸며졌다. 추모제에는 시민 80여 명이 참여했다.
성재 씨는 “코로나19로 희생되신 수많은 가족분은 죄인 아닌 죄인처럼 아픔을 치유할 기회와 위로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몫으로만 견뎌내고 계신다”며 “코로나19 희생자의 이면에는 의료 공백, 낙인과 차별, 배제와 외면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구든,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함께 아픔을 치유하며 추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저 숫자로 잊힐 뻔한 유엽이를 누군가가 기억해 주고 추모해 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위안과 치유가 되었듯, 다른 많은 분들도 사회적 공감과 위로를 통해 일상으로의 회복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며 “유엽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진상규명과 대책 마련, 공공의료 체계 강화와 확대를 통해 누구나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성재 씨의 도보행진 첫날 일정을 함께했던 김동은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진료사업국장(계명대 동산병원 교수)도 무대에 올라 ‘기억’을 전하고 ‘애도’하면서, ‘연대’의 뜻을 나눴다. 김 국장은 “3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도보 행진할 때 팔달교를 넘어서 칠곡으로 넘아가는데 아버님이 다리를 절뚝거리셨다. 양말을 벗고 발을 봤는데 제가 봤을 땐 더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유엽이 생각하면 걸을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저께 대구시장이 제2대구의료원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사회가 요구했던 대부분이 받아들여졌다. 선거를 앞두고 하는 얘기라서 정말 지켜질지 계속 감시해야 되겠지만 지난 2년간 이야기한 것이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보면서 유엽이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며 “유엽이가 하늘에서 공공의료를 지켜주고 있고, 아버님께서 발을 다쳐가며 서울로 걸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고 전했다.
지난 15일 제주에서 다른 세상을 위한 순례 일정을 시작한 문정현 신부도 추모제에 참석해 성재 씨에게 연대의 뜻을 전했다. 문 신부는 “학교 앞에 가면 어린이보호구역이라고 해서 30km로 해야한다. 희생된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생긴 일이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죽은 김용균이라고 들어보셨을거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생겼는데, 김용균이 어머니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코로나19, 병원이 있어도 치료 받지 못하고 어디 갈지 모르고 희생한 젊은이가 생기고, 아버지, 어머니가 나섰다”며 “나라가 국민의 안전을 위하는게 아니라 희생된 이의 어머니, 아버지들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이뤄지고 있는거다. 저는 아버님, 어머님께 정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정부도 하지 않은 이것을 어머님, 아버님께서 감당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추모제는 이들의 발언을 포함해 유엽 씨와 함께 추모하게 된 이들의 사연을 나누고 헌화하는 순서로 마무리됐다. 추모제는 ‘코로나19 의료공백으로 인한 정유엽사망대책위원회’를 포함해 인권운동연대, 인권실천시민행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구인권위원회, 경북시민인권연대회의(준), 경북노동인권센터 등이 함께 주최했다.
이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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