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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2022년 1월 26일부터 한 달 동안 49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일하다가 사고로 죽지 않도록 하라는 국가의 신호는 지난 2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틀 만에 삼표산업 산재 사망 사고로 깨졌다. 하루 2명 꼴로 산재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한국 사회는 정말 변화할 수 있을까.
①“ ‘사고 사망 노동자’ A 씨, 우리 아버지 전수권입니다”
② 대구경북 지역 산재 사망 판결, 실형 선고는 단 3.5%
③ 중대재해처벌법 탄생 약사···반복된 참사의 기록
④ 퇴직까지 산재 숨긴 포스코 노동자의 후회
⑤ 잘나가던 불로반점 사장님, 가게 문 닫은 사연
⑥’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산재 부상, “통합 체계 필요”
1월,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여파는 경북 영양군에 사는 이일한(69) 씨에게도 미쳤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사고 소식을 심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 구정을 맞아 고향을 방문한 아들이 지나가듯 슬쩍 말했다.
“우리 회사도 거기 들어가가(들어가서) 일했는데요”
아찔했다. 아들은 붕괴 현장에서 일하지 않았고, 현장 작업자들도 빨리 빠져나와 다친 사람은 없다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위험 속에 살아가는 삶을 대물림했다는 자책감도 찾아왔다.
일한 씨는 위험한 일터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온전히 살아남지는 못했다. 산화철을 환원하는 공정에서 나온 분철 광석이 쏟아지면서 두 다리에 3도 화상을 입었다. 그 이후 삶은 이전과 달랐다. 고통과 후회가 이어지는 삶이었다.
평생 포항제철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몇몇 동료가 산업재해로 사망해 먼저 떠났다. 제철소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러시안룰렛 같았다. 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격발되는 것이다. 일한 씨는 산업재해를 겪고서야 아픔과 여생의 무게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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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스물 다섯이던 일한 씨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포항제철소 기능직으로 입사했다. 결혼을 일찍 하는 바람에 아이 둘이 있었는데, 당시 공무원 봉급으로는 가족 네 명이 먹고 살기에 부족했다. 포항제철소는 입사하면 임대주택도 나오던 시절이었다.
처음 투입된 공정은 제선공정이었다.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공정이다. 그 시절 노동자 보호를 위한 장비는 변변찮았다. 용광로에서 나오는 먼지를 포집하는 집진기도 없었고, 노동자는 방열복과 방열장갑에 의지해 고온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30년 근무하는 동안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다. 의지하던 동료가 다치거나 죽는 일도 있었다. 하루는 친분 있는 후배가 파이넥스 공정에서 막힌 설비를 뚫다가 갑자기 흘러나오는 고온의 철괴에 맞아 사망한 일이 있다. 그럴 때마다 현장 분위기는 처참했지만, 일을 멈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만두고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고, 가족을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현장 분위기는 삭막했다. 동료들은 웬만한 부상은 요양은 고사하고, 자비를 들여 치료했다. 다치는 사람이 나오는데도 공장에 걸린 무재해 일수는 줄어드는 법이 없다. 공식적으로 재해가 확인되면 부서장이나 반장이 문책을 당한다. 승진 욕심도 있어서, 더더욱 다쳤다는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현장에는 다친 사람이 동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란 분위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분위기가 잘못됐다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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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 씨는 퇴직(2008년)을 앞에 두고 큰 화상을 입었다. 야간 근무조로 파이넥스 공장에 들어간 일한 씨는 환원로 비우기 작업을 시작했다. 용융로에서 가스가 나와 환원로로 가고, 환원로에서 산화된 분철광석이 환원되는 공정이다. 용융로와 환원로 사이에 데드맨이 분철광석 더미에 막혀있었고, 일한 씨는 막힌 데드맨을 뚫으려 더미를 철봉으로 뒤로 밀었는데 고온의 분철광석이 오히려 일한 씨 쪽으로 무너졌다.
고온의 가루가 작업화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일한 씨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제 죽는다고 생각했다. 고통과 함께 정신이 들면서 늪에서 발을 빼듯 빠져나왔을 때, 주변 동료들이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동료들이 작업화를 제거하고 보니 두 다리 피부가 돼지껍데기처럼 말려 들어간 상태였다. 얼음찜질을 하며 개인 병원에 가서 응급조치했다.
응급조치를 하고 보니 생각보다 버틸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일한 씨는 이튿날 출근했다. 화상의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직장에서는 누구도 일한 씨에게 산업재해를 신청하고 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버티다 못한 일한 씨는 연차 휴가를 내고 종합병원에 갔다. 의사에게는 물을 끓이다가 쏟았다고 말했다. 치료도 자비로 했다. 혹시나 병원에서 회사에 산재 처리를 위해 확인 절차를 진행할 것을 우려했다.
15일분의 연차가 있었는데 남은 연차를 다 쓰며 입원해도 완치되지 않았다. 15일 만에 주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임은 후배들 보기 좋지 않으니 출근해서 쉬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출근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후배 동료들도 일한 씨의 사정을 이해하겠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별수 없었다. 일한 씨가 다친 탓에 결과적으로 한 사람 몫의 일손이 줄었기 때문이다. 일한 씨는 자책감이 들었다.
치료비 수백만 원도 자비로 감당했다. 무엇보다 괴로운 점은 전처럼 몸을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킬레스건을 다쳐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앞으로의 여생을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막막함. 일한 씨는 먼저 다친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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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일한 씨는 고향인 영양으로 귀향해 소를 먹이며 살고 있다. 화상 사고로 6급 지체장애 장애인이 된 일한 씨는 지팡이가 없으면 걸어 다니기 힘들다. 체력 관리를 하려 등산이라도 해보려 해도 오르막은 언감생심. 사방이 산이지만 갈 수 없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마음도 아팠다. 실수로 다쳤다는 자책감. 다치고도 산재 신청조차 못 해봤다는 자괴감. 산재 신청해서 적합한 치료를 제대로 받았다면 지금보다 상태가 훨씬 나았을 텐데. 다른 사람은 알 길이 없는 고통을 혼자 짊어졌다는 억울함도 들었다.
지난 구정 아들이 일한 씨 집을 방문했을 때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직후다. 평소에도 안전사고와 관련한 뉴스를 꼼꼼히 살피던 일한 씨는 제대로 된 제도 시행을 바라면서, 그는 자신의 후회를 같은 처지의 노동자에게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아파트 붕괴 얘길 하더라고요. 그 회사 작업자들이 소리 듣고 빨리 빠져나와서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해서 다행스러우면서도. 그래도 돌아가신 분들한테는 심심한 위로를 해주고 싶죠. 다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자식 먹여 살리려고 공사장 가서 일하는 분들 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어딘가 빈틈이 있기 때문에 사고가 나는 겁니다.
티비를 보고 있으면 여기서 죽었다. 저기서 죽었다 소식이 나오는데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게, 어떻게 보면 70년대나 지금 2020년대나 똑같습니다. 인식이 똑같은 거예요. 책임자들을 강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현장 책임자뿐만 아니라 위에 관리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야 책임자들이 현장 분위기도 바꾸고 지원도 할 거 아닙니까.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에 기업이 해외로 간다고요? 그러면 중국 가서, 베트남 가서 거기서 사람 죽이면 괜찮습니까?
자꾸 자책하게 됩니다. 평생을 후회하고 살고 있어요. 제대로 치료 받았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건데. 누구 하나 병원 입원하라는 말 하는 사람이 없었어. 산재 안 올린 내가 잘못이죠. 다치고 나서 친구고 뭐고 없어졌어요.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내가 다닌 회사 욕 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앙심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후배들이 다치지 않고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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