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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은 한국전 참전 경력으로 훈장과 연금을 받는 국가유공자다. 인생의 황혼을 맞은 그의 마지막 소망은 호국원에 안장되는 것이다. 그를 돌보는 건 둘째 아들 정대 가족이지만 부자지간은 원만하지 않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아들을 영춘은 탐탁찮게 여긴다. (첫째아들 정균은 도회지에 산다) 영춘과 정대는 가시가 돋친 말로 자주 툭탁거린다.
이 집안의 3대째인 정대의 딸 다윤은 프랑스 유학을 앞뒀다. 농한기라 따로 돈을 마련하기 힘든 정대 부부는 영춘이 가진 선산 묏자리를 팔면 어떻겠냐고 상의한다. 어차피 호국원에 가실 테니까. 그런데 영춘에게 ‘국가 국립묘지 생전 안장심의 불가 판결’이 떨어진다.
대구영화학교 1기 출신 박찬우 감독은 데뷔작 <다섯 식구>부터 가족의 이야기를 꾸준히 소재로 작업 중이다. 그의 작품은 가족영화 범주에 속하지만, 통념상의 그것과는 꽤 동떨어져 있다.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기 영화 소재로 ‘가족’을 활용하는 이유는 인간의 복잡한 단면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라 밝혔던바, 박찬우 감독이 가족을 다루는 스타일도 그와 통하는 구석이 제법 있다.
<국가유공자>의 발상은 2019년 감독의 할아버지 발인 장소에서 아버지가 관에 묶인 태극기를 고치면서 나눴을 산자와 죽은 자 간 무언의 대화를 상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일제강점기부터 100년 가까운 시간을 거치며 축적된 가족 3대 관계를 통해 (감독 의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순 없지만) 한국현대사에서 거시적으로는 국가의 역할과 한계, 미시적으로는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가족의 초상을 미화라곤 찾기 힘든 풍경화로 그린다.
영춘은 국가유공자라는 명예를 평생 자랑으로 삼아왔다. 한국전쟁 후 그의 인생은 고향에서 농사짓는 소시민이었을 테고, 가장으로서 그의 선택은 장남에게 우골탑 자원집중으로 향했다. 그리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원대로 도시로 떠났다. 자수성가 못한 채 수발드느라 수고하는 둘째는 성에 차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우리의 수많은 부모들은 구한말로부터 일제강점기,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랑의 시절에 오직 믿고 의지할 것은 가족 공동체밖에 없다는 신념을 경험적으로 유지해왔다. 국가는 수탈과 희생을 강요할 뿐 제대로 삶을 책임지지 않았다. 그렇게 확고하게 다져진 가족의 뿌리이자 줄기인 가부장제 하에서 장자에게 몰아주던 혜택과 관심들은 굳이 <국가유공자> 속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대중문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렇게 부자간에 어릴 적부터 맺혀온 감정은 영화 속에서 묵을 대로 묵혀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한국근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대상이었던 가족 공동체의 원초적 관계는 애증으로 유지되고 있다. 결국 싫은 소리도 버럭 지르고 한풀이를 할지언정 영춘을 생각하는 건 내내 수발을 들어왔던 둘째 아들과 며느리다. 영춘 역시 못내 미안한 감정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패인 골로 인해, 그리고 경상도 어른들 특유의 무뚝뚝함 탓에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염상섭의 ‘삼대’에서처럼 조부와 부모 세대 간 갈등을 지켜보며 이해와 조화를 시도하는 역할은 정대의 딸 다윤의 몫이다. 자신은 겪지 못한 할아버지의 생애를 궁금해하는 동시에 부자간의 애증을 곁에서 관찰해온 그가 과연 국가유공자 조부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는 감독이 가진 문제의식과 닿아있는 지점일 테다.
동족상잔의 전쟁도 절대적 빈곤도, 억압적 국가폭력도 체험하지 못한 후속세대는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희생당하며 그 모든 과정이 (실질과는 무관하게) 국가라는 기구에 의해서만 규정당해 온 이전 세대를 온전하게 이해 가능할 것인가. 하나둘 사라져가는 예전 세대 당사자들을 미래세대는 그저 망각할 것인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기억할 것인지를 관객은 영화를 보고난 뒤 확장된 질문으로 품게 될 것이다.
영춘은 과거에 사로잡힌 채, 평생 거대한 국가체제에 복무해온 인물이다. 그의 대외적 정체성은 바로 그 국가로부터 규정되고 제공받는 가치에 종속된 채다. 하지만 행정서류 상의 존재를 넘어, 미운 정 가득해도 혈연과 일상을 공유했던 가족들이 그에게 갖는 기억은 어떨까? 두 공적-사적 관계가 어떻게 교환과 통합을 거칠 것인지에 대해 <국가유공자>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보고난 관객들은 각자의 체험과 기억을 통해 감독이 전하는 이야기를 소화할 것이다. 스스로 겪지 않았어도 주변 가족을 통해 간접체험은 해봤을 요소들을 재구성하는 기회를 통해 3대를 아우르는 한국현대사의 단면을 재발견하는 시간을 각자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작품정보>
국가유공자 Man of National Merit
2021|드라마|33’22”
감독 박찬우
출연 김삼일, 박일용, 김금순, 류한빈
배급 센트럴파크
2021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심사위원상
2021 합천수려한영화제 대상
김상목 영화칼럼니스트
spanishbom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