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바뀐 세상, 병자호란 그후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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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음력 1월 20일,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살았던 김령金坽은 현감이 건네준 조보를 받아 들었다. 조정에서 먼 예안까지 전해진 조보에는 조정처럼 매일 매일의 소식이 실려 있지는 않지만, 근 한 달 동안의 소식이 함께 묶여 배달됐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왕이 청에 무릎을 꿇고 난 후 처음 맞는 새해인지라, 조보의 소식 역시 대부분 청나라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청나라의 감시와 간섭도 심했고, 청나라와 맺은 사대事大관계로 인해 바꿔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꼬장꼬장한 지역 선비 김령의 눈에는 이런 소식 하나하나가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조보에 따르면, 지난달(1637년 음력 12월) 18일, 조선 사행단이 청나라로 출발했다. 그런데 임금이 직접 모화관까지 나가서 (김령의 표현에 따르면) 오랑캐에게 보내는 표문에 절까지 했다. 물론 명나라에 사행을 보낼 때에도 표문에 절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의례였다. 공식 외교문서인 표문에 예를 표하는 이유는 명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사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김령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에 패한 지 얼마 되었다고 표문에 굳이 절까지 해야 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령에게 사대는 중화문명에 대한 존경의 표시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일은 또 있었다. 새해를 맞는 정월 초하루에 임금은 직접 오랑캐(청나라)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망궐례를 행했다. 망궐례란 신하들이 직접 궁에 나아가 왕을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 방향을 향해 올리는 의례이다. 주로 외직이나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관원들이 매월 초하루나 보름, 또는 신년 등의 날에 맞추어 망궐례를 행했다. 더불어 조선처럼 중국의 제후국을 자임하는 경우, 신년이나 황제의 생일 등의 날에도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망궐례를 행했다. 이는 자신이 다스리는 먼 지역에까지 왕(혹은 황제)이 내재해 있음을 자임하는 것으로, 충성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많은 신하들이 인조의 망궐례를 말렸다. 새해 첫날이기는 해도, 날씨를 핑계로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황제에 대한 망궐례에는 신하들도 참여해야 하니, 이들 입장에서는 추운 날씨마저 좋은 핑계거리였다 그러나 왕은 “내가 직접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망궐례를 강행했고, 신하들은 심양을 향해 숙이기 싫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물론 명나라에 대한 망궐례였다면, 날씨가 문제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김령이 보기에도 왕은 오랑캐를 섬기는 예마저 심하게 극진했다. 물론 예는 원래 극진해야 하지만,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헌부 집의에 임명된 조석윤의 사직도 청과 관계되었다. 조석윤은 병자호란 직전까지 강하게 척화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전란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는 영남 지방 병사들을 점고하러 갔다가 거기에서 전쟁을 맞았다. 지방의 병력을 모아 싸우려 했지만, 전쟁이 빨리 끝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마 그가 조정에 있었다면, 그 역시 척화 강경론파들과 함께 벌을 받거나 참형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조석윤은 자신이 척화를 주장했던 사람들과 같은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면서 관직을 거부했다.

문제는 인조의 반응이었다. 지역 선비인 김령마저 ‘그 언사가 간절하면서도 사리에 맞았다’고 말할 정도의 사직 상소였다. 청나라 지배 상황에서 왜 스스로 벼슬을 할 수 없는지를 간곡하게 아뢰었다. 그런데 인조는 상소를 읽은 후 “와서 벼슬하고 싶지 않으면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게 좋다. 뭐 하러 수고롭게 궁에 와서 이처럼 고의로 성가시게 하는가”라고 반응으로 상소에 답했다.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왕이라면 쉽게 내뱉기 힘든 반응이었다. 오죽했으면 옆에 있던 승지가 깜짝 놀라 주상의 언사가 온당하지 않다고 장계(보고서)까지 올렸지만, 인조는 오히려 조석윤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까지 덧붙였다. 청나라 황제의 반응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김령의 눈에 임금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이다. 굳이 청나라로 가는 표문에 절할 이유도 없었고, 추위를 핑계로 망궐례를 중지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조석윤의 사직 역시 최소한 사직하는 그 마음이라도 읽어 주어야 했다. 김령을 비롯한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이념적 중화中華는 여전히 명나라였기 때문이다. 사대는 중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만큼, 굳이 진심을 담는 행위까지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대부분의 유학자들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의례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적 당위마저 깨면서 말이다.

예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은 유학 기반의 도덕 원론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바꿀 수 없는 황금률이다. 사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오랑캐라면 의례마저도 행해서는 안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예에 굳이 진심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은 엄혹한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낯선 장면이기는 하다. 차라리 사대 대상을 바꾸어 예와 진심을 일치시키는 인조의 행동이 더 유학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명과 청을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가치로 판단했던 당시 유학자들에게서는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바로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병자호란은 유학자들에게 ‘마음과 행동의 일치(知行合一)라는 황금률’과 ‘선악으로 명과 청을 나누어 보는 인식’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많은 학자들은 병자호란을 외교적 실패가 낳은 참사로 본다. 물론 병자호란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념 중심의 외교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 이념은 이념이고 외교는 외교라는 유연한 사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명나라를 선이자 중화라는 이상적 모델로 규정하지만 않았어도 좀 더 실용적 외교가 가능했을 터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1년이 지났지만, 조선 유학자들은 여전히 이념에 따라 사대해야 할 대상과 그렇지 않아야 할 대상만을 구분하고 있었다. 사대의 대상만 바꾼 인조와는 다른 듯하지만, 명분 중심의 사고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를 것도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바뀌기 어려운 듯하다. 근 400년 가까운 세월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상 국가와 행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념 중심으로 외교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