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87년 이윤빈 무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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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음력 1월 4일, 새해 첫 근무를 위해 무겸청武兼廳(선전관청 : 선전관들이 소속되어 있는 관청)에 들어간 노상추는 평사시와 같이 조보朝報부터 펼쳐 들었다. 조정에 속한 관사에는 거의 매일 조보가 전달되었기 때문에 입직을 서야 하는 무관에게도 조보 내용은 중요했다. 비번이었을 때 발생한 조정 소식과 지역 관련 내용, 인사이동 상황 등 조정의 중요 소식을 한눈에 알 수 있으니, 근무에 임해야 하는 관리 입장에서는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뉴스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곳의 소식인 만큼, 궁궐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담당하는 별군직에 대한 뉴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보에는 노상추가 비번이었던 어제(1월 3일)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과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이 곤장을 맞은 소식이 실려 있었다. 왕을 시위하는 자리에 있다 보면 작은 실수는 늘 있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곤장 한두 대쯤 맞는 일은 으레 있는 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려다가 사건 정황을 보니 사안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죄목이 무고인 데다, 최종 처결은 유배였다. 곤장을 맞는 일이야 그렇다고 해도, 유배는 상황이 달랐다. 실수를 지적하기 위한 곤장은 승진을 비롯한 인사상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유배는 특별하게 정치적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관직으로의 복귀가 쉽지 않았다. 병마절도사쯤 되면 여러 경로를 통해 다시 복귀를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승진 경쟁이 치열한 별군직의 구순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처결이 왕의 분노로 인한 것이니, 적어도 현 왕이 재위에 있는 동안 관직에 발을 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사건의 정황을 알아보니, 왕의 분노는 이해가 되었다. 구순은 평소 함께 별군직에서 근무하는 이윤빈李潤彬과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평상시 드러난 충돌만해도 여러 번인 듯했다. 그런 구순에게 기회가 왔다. 세자의 사망으로 인해 국상을 치루는 기간에 이윤빈의 아버지 이방일이 집을 넓히는 공사를 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당연히 문초 대상이었고, 실제 이로 인해 이방일은 문초를 받았다. 지금이야 이런 게 죄가 될까 싶지만, 조선 시대 국상은 부모의 상을 치루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단속해야 하는 기간이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최소한 그 기간 근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오면 곤란했다. 고기를 먹어도 안 되고, 부부가 합방해서도 안 되었다. 국가 전체의 근신 기간에 집 고치는 공사를 했으니, 경을 칠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미워서 이윤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있었던 구순은 기회를 잡았다. 그는 이방일이 집을 고치는 공사를 할 때 아들인 이윤빈도 함께 공사를 했을 것이라고 고변했다. 그러면서 집을 고치는 데 드는 돈을 뇌물로 해결했을 것이라면서, 근신의 문제를 뇌물 문제로까지 연결시켰다. 이방일이 집을 고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구순은 이 사실을 기반으로 추정에 추정을 더했다. 아버지가 집을 고쳤으니, 당연히 아들도 집을 고쳤을 것이고, 그 비용이야 뇌물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윤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문제만 해도 이미 적지 않게 도덕적으로 상처를 입었는데, 자신까지 고변을 당하니 이만저만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집을 고친 일은 조사가 가능했다. 이윤빈 역시 관원이었으니, 조사를 받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되자 관원들이 나가 이윤빈의 집을 조사했다. 뇌물은 집을 고치기 위한 비용이라고 했으니, 집을 고치지 않았다면 뇌물에 대한 주장도 근거를 잃을 터였다. 조사 결과, 집은 고친 적이 없었고, 뇌물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전형적이 무고였다. 이렇게 되자 왕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특히 자신의 신변을 지키고 보호해 왔던 무관이 모범을 보이지 않고 악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에 대해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에 대해 왕이 직접 나서서 강한 처벌을 내렸다.

왕의 명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을 몇 대 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때리라’ 명하고, 그래도 죽지 않으면 제주목에 유배를 보내라는 명이 더해졌다. 보통 곤장형은 죄에 따라 양형 기준을 두게 되어 있지만, 조금만 심하면 이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곤장형에 대한 명은 대체로 생명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때리라’고 했으니, 얼마나 가혹한 명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시대 유배형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을 의미했다. 이는 공동체를 통해 보증받았던 자기 존재 지위와 가치를 일순간에 박탈당하는 것이어서, 유배형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형이었다. 그런데 제주목에 정배는 ‘절도 유배’에 속했다. 즉 섬 지대에 유배를 보내 육지와 격리시키는 유배형으로, 주로 정치범이나 역모 등에 연루된 사람들이 대상이 되었다. 중형 가운데에서도 중형이었다.

게다가 정조의 분노는 무고를 자행한 구순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지휘 책임을 물어 병마절도사 조학순 역시 곤장을 때리고 먼 곳에 유배 보내도록 조치했다. 자신의 휘하 군관 하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곡식만 축냈다면서, 강하게 지휘 책임을 물었다. 조학순 입장에서야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지만, 정조는 연대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 스스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했다. 특히 이러한 그의 처벌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 무고를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가 어떻게 처벌할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했다.

역사를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 입장이라면, 이러한 정조의 분노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정조는 무고가 미치는 엄청난 결과를 정확하게 보았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 정치적 경쟁이 당파 간의 싸움으로 이어졌던 조선시대에서 무고는 상대방에 대해 단순한 도덕적 흠결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로 비화되곤 했다. 무고는 그 특성상 단순한 의심에서 확신으로, 그리고 하나의 확신이 두 세 개의 혐의로 증폭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혐의들에 대해 여론과 집단의 이름으로 처벌을 요구하면서, 쉽게 중범으로 몰렸다. 무고가 낳은 증폭의 마법은 상대방의 생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구순에 대해 살인죄에 준하는 수준으로 처벌했던 정조가 이해되는 이유이다.

명분과 이념을 중심에 두는 정치 구조에서 말은 늘 칼보다 날카롭다. 이념은 작은 범죄와 큰 범죄를 구분하지 않고 이념에 위배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념이 지배하는 정치 구조에서 말은 작은 사안도 큰 범죄로 만들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고는, 그래서 가짜 뉴스는, 사람을 해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 가운데 하나이다. 정조의 처벌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단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정조의 고민과 분노의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도 이해가 가능한 이유이다. 대선 30일 전, 앞으로 판칠 가짜 뉴스들에 대해 우리는 정조와 같이 분노할 수 있을까?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