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44년, 병곡역 난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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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12월 21일, 박취문朴就文은 경상도 영해군에 있는 병곡역(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일대)에 머물렀다. 꼭 30년 전, 아버지 박계숙朴繼叔이 걸었던 길인 탓에, 처음 가는 길이지만 익숙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박취문은 30년 전 아버지 박계숙처럼 무과에 응시해서 1644년 급제했다. 그리고 아버지 박계숙이 군관으로 근무했던 함경도 회령에 그 역시 초임 군관으로 발령을 받아,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 중이었다.

고향인 울산에서 길을 나선 지 보름 만이었다. 병자호란 이후인지라,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명목은 많은 무과 합격자로 드러났고, 그러다보니 같은 지역에서도 함경도 회령으로 발령받아 초임 근무하러 가는 선달들이 심심치 않게 많았다. 길에서 만난 이들과 자연스러운 동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터였다. 적지 않은 젊은 군관들이 수발들 노비까지 대동해서 움직이다보니, 어지간한 부대 규모는 된 듯했다.

병곡역은 조선의 역원 가운데 하나였다. 역참으로도 불렸던 역원은 조선의 중앙집권제 실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시스템이었다. 역원은 중앙과 지방을 잇는 교통로이자 통신시설이었으며, 국가의 공적 업무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원들을 대상으로 숙식과 역마를 제공하는 편의 시설이기도 했다. 역은 본역과 그에 속한 속역으로 나뉘는데, 본역은 종6품 관직의 찰방이 근무하고, 역리들 역시 6방 체제를 갖추어 국방과 지역 업무를 담당했다. 이에 비해 속역은 지역에서 선발된 역장과 부장, 그리고 업무에 필요한 노비들이 배치되어 주로 숙식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선은 이러한 역참 시스템을 통해 효율적으로 지방을 관할하고, 정보와 교통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박취문을 비롯한 젊은 군관들 역시 공무로 떠난 여행길이니 역참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들이 하룻밤 묵으려 했던 병곡역은 찰방이 근무하는 본역은 아닌 듯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병곡역에 도착했지만, 역장은 보이지 않았고, 역리들 역시 이제 막 무과에 합격해서 군관으로 취임해 가는 젊은 선달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대접은 시원찮았고, 맞이하는 태도 역시 공손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혈기왕성한 군관들 눈에는 이만한 꼬투리도 없었다.

저녁이 되자 이확과 박이명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앞으로 대부분의 역에서 이러한 대접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여기에서 대책을 세워 출발하자는 논의가 일었다. 저녁이 되도록 여전히 역장은 보이지 않았고, 역인들 역시 제대로 음식을 내주거나 접대를 하지 않고 있다보니, 이들의 결심은 쉬웠다. 대접을 빌미로 크게 사고를 쳐야 역로를 타고 소문이 나서 다른 역의 대접이 달라질 것이라는 추측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확과 박이명은 사내종들을 시켜 자리를 비운 역장을 잡아오게 했다.

역장이 종들에게 붙잡혀 왔다. 속역은 지역의 양인 가운데 역장을 임명하니, 쉽게 수소문이 된 듯했다. 몇 대 패서 소문을 내면 이날의 대접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대접도 달라지리라 생각하고, 노비들로 하여금 역장을 거꾸로 매달게 했다. 그리고 막 매질을 시작하려는 찰나, 이쪽저쪽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달려들어 역장을 매달아 놓은 새끼를 잘랐다. 당한 쪽의 기록인지라 부풀려 질 가능성도 있지만, 박취문의 눈에 백여 명은 넘어 보였다. 이들은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역장을 잡아오게 한 박이명과 이확 두 명을 잡아가려고 했다. 술 취한 군중이 흥분까지 한 상태이니, 여기에 잡혀갔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듯했다.

박취문과 동료 군관들은 목숨을 걸고 버텨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박취문과 동행하고 있었던 언양지역 군관들 몇 명도 달려왔지만, 좁은 방 앞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군관들의 사내종 한 명은 역 사람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낭자했고, 역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과급제자들이라고 해도 성난 군중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확과 박이명은 역인들에게 난타를 당하면서 끌려나갔고, 박이명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온갖 곤욕을 당해야 했다. 군관들 중 한 명이 급하게 영해부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날 하필 영해부사가 자리를 비워, 형방이 급히 군졸들 몇 명을 데리고 와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군관들과 사내종, 그리고 역인들 몇 명이 영해관아에 끌려갔다. 그러나 영해부사가 없는 상황에서 형방이 양반신분의 군관을 취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사안을 들어보니 사태의 시작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군관들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형방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은 군관의 사내종에게 곤장 몇 대씩을 때려 내보는 게 전부였다. 일은 적당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젊은 군관들 입장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선달들이 건들지 말아야 할 벌집은 건드렸던 것이다.

사실 역인으로서의 생활은 젊은 군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원칙상으로 역인들은 국가의 공무로 오는 사람들에게 규정대로 숙식을 제공하면 끝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속역의 경우 역장마저 신분이 양인인 경우가 많아, 지방을 여행하는 양반관원들은 이들을 자기가 노비 부리듯 했다. 양반들은 공무가 아닌 일로도 역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마패 없이 말을 교체하기도 했다. 게다가 규정 외에 호화로운 접대를 공공연히 요구하는 경우도 많아, 그 부담은 그대로 역인들의 몫이었다. 특히, 병자호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 때문에 국가는 각 역에 보장해 주어야 하는 재원마저 안정적으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안 그래도 불만이 찰 만큼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 막 무과에 급제한 신출내기 선달들이 대접 소홀을 이유로 역장을 핍박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섭을 지고 불에 뛰어든 격이었다. 물론 선달들 역시 신분은 대부분 양반이고 관직이 예정된 인물들이니만큼 이들이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양인들이라도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선달들의 폭압까지 참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빌미만 있으면 자신들의 불만을 폭발하고 싶었던 역인들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선달들은 오히려 좋은 대상이 되었을 터였다. 아무리 신분제가 강하고, 양반과 천민의 구분이 분명해도, 그 역시 사람 사는 시대였다. 예나 지금이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