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여성으로서 받는 고통”에 대해 / 이소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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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시 머무르고 있는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엔 세대 내 흡연으로 인해 건물에 거주하는 입주민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공지가 붙어있다. 베란다 및 계단에서 담배꽁초를 창문 밖으로 버리지 말아 달라는 다분히 상식적인 공지인데 아랫부분엔 붉은 글씨와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특히 여성 입주민에게는 큰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왜 흡연으로 인해 여성 입주민이 특별히 큰 고통을 받는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 거려진다. 대부분의 흡연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은 흡연을 하지 않기 때문에?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흡연율은 21.5%다. 한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남성, 여성을 구분하지 않아도 비흡연자이고 오피스텔과 같은 1인 가구가 대부분인 건물에서 흡연에 의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남성이 여성보다 덜 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남성 흡연율이 여성보다 다섯 배 정도 높긴 하지만 여성의 흡연율도 7% 가까이 되는 바 여성 흡연자 수가 결코 적다고도 할 수 없다. 결국 ‘큰 고통을 받는 여성 입주민’은 여성에 대한 상상을 바탕으로 하는데 바로 비흡연자 이면서 남성 흡연의 피해자이고 특별한 고통의 당사자라는 것이다.

뜬금없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네거티브 공방이 주 무기가 된 이번 대선에서 한 후보의 부인이 ‘리스크’로 부상한 가운데, 대선후보와 그가 속한 야당은 그 부인이 ‘여성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며 동정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많은 고통’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면 접대부 의혹 등 여성이란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공격이나 화장이나 헤어스타일 등 외모 평가에 대한 부분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위이력과 관련한 의혹에 검찰 조사를 받을까봐 ‘여성으로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라고 전하는 윤석열 후보의 발언을 보면 그동안 검찰 조사를 받은 수많은 여성은 황당한 마음일 것 같다. 왜 김건희 씨는 유독 ‘사람’이기 전에 ‘여성’인 것처럼 표현되는지 참 의아스러운 일이지만, 그 전에 마치 존재만으로 자연스럽게 동정을 부르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한번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김건희 씨를 둘러싼 ‘불편함’의 큰 부분은 그가 자신의 여성성을 특정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에 있다.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김건희 씨의 화장법을 비판한 국회의원이나 그가 사회 특정 계급을 상대로 동거 및 약혼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네티즌의 공통점을 짐작해 본다면, 그들 주위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연상되어 반감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난히 친족 관계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데 익숙해 보이는 김건희 씨는 이전엔 처음 보는 기자를 ‘오빠’라고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한 기자에게 보인 모습으로 ‘센 언니’의 ‘부캐’까지 획득하였다.

▲MBC 스트레이트가 방송한 김건희 씨가 서울의 소리 기자와 나눈 대화 중 일부. (사진=MBC 스트레이트)

김건희 씨가 받고 있다고 호소하는 ‘여성의 고통’이 심히 우려되는 이유는 그 고통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 굳건한 가부장 체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라서 (더 쉽게) 받는’ 그리고 ‘여자이기 때문에 받으면 안 되는’ 이 역설적인 고통은 연약한 여성의 모습을 상상하며 여성의 가족 내 역할을 우선시하며 여성의 사회참여를 조건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가부장 제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여성은 고통에서 구조되어야 할 대상이며, 구조의 주체는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에게 의지해야지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받았다고 하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다른 여성이 받은 고통에 공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변의 위협과 과거 아픈 기억에도 불구하고 #미투운동으로 용기를 낸 젠더기반폭력 생존자들을 단지 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온 치졸한 사람 취급했으며 심지어는 법원판결로 수감된 성폭력범죄자 안희정을 옹호했다.

용기를 낸 김지은 씨가 ‘피해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에게 불리한 선고를 한 1심 판결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이후 법원 판결은 여성의 고통은 가부장제의 상상 속에서 정형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을 부정했다는 면에서 값진 것이었다. 반대로 김건희 씨는 ‘고통당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성폭력에 대해 폭로하여 용기를 낸 다른 여성의 고통은 지우는 모순되는 모습을 보였다.

젠더기반폭력의 심각성이 지난 몇 년간 화두가 된 가운데 여성으로서 당하는 다각적 고통에 대해 우리 사회가 예민한 관심을 기울여야 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러한 관심은 연약한 여인에 대한 상상에 의한 것이면 안 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주는 가장 값진 교훈 중 하나는 여성의 모습과 목소리는 다양하며 그들의 정체성은 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말하는데 고통 받는 여성에 대한 연민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이소훈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