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에게 12월은 인사 평가와 그에 따른 인사이동이 이루어지는 달이다. 한 해 실적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승진과 전보, 혹은 전출을 결정하는 일에 모든 공무원이나 직장인의 촉각이 곤두서는 시기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관료주의가 발달했던 조선의 12월은 현재 공무원이 맞는 12월과 크게 차이가 없을 듯하다.
1570년 음력 12월 7일, 조선 조정에서는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있었다. 도목정사는 관료에 대한 임명을 위한 회의로,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전보, 파면 대상자를 정하는 일종의 인사회의였다. 고려시대 때 관리에 대한 인사 조치를 도목都目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말로, 관료에 대한 인사이동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도목정사라고 불렀다. 문관과 무관으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양반兩班’에 대한 도목정사는 6월과 12월이 원칙이었다. 특히, 조선은 중요하거나 시급한 인사조치가 필요하지 않으면, 공석이 생겨도 도목 이외의 절차를 통해 관리를 보임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려 했다. 그러다보니 도목정사는 관리뿐만 아니라, 과거를 준비하는 예비관료까지 전국적 관심을 받는 회의였다.
도목정사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이조에서는 이조의 수장인 이조판서 정대년을 중심으로, 행정업무 수반인 이조참의 허협, 그리고 인사담당 실무자이인 이조좌랑 이증과 오건이 참석했다.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는 우부승지 이제만이 이조 측 인물로 참석했다. 병조 역시 병조판서 오상과 병조참판 박계현, 그리고 병조 인사 담당자인 병조참지 박승임이 들어왔다. 그리고 승정원에서는 좌부승지 이충작이 참여했다. 지금으로 보면, 행정 및 군공무원 인사회의에 행정안전부 및 국방부 장‧차관, 인사 실무 담당자,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 담당자까지 참여한 모양새이다.
아침부터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럽기 짝이 없는 추운 날씨였다. 그러나 이조와 병조 인사담당자들은 새벽부터 정신이 없었다. 각각 광화문 밖에 있었던 이조와 병조에 들려 인사발령 심의를 위한 서류를 챙겨야 했다. 그런데 이 서류가 만만치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인사발령을 위한 서류는 인사 대상 범위와 그 범위 안에 든 사람의 인사 이력이 필요했다. 인사 이력에는 그 사람의 문중과 통상 4대조를 포함한 조상, 그리고 학통까지 포함되었다. 더불어 개인의 인사이동을 위한 근속기간, 근태, 공적이나 처벌 받은 사항, 능력 평가 등을 기록한 서류가 첨부되었다. 특히, 12월은 인사고과를 매기는 시기인 만큼 평가점수 역시 참조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한 서류를 정안政案이라고 했다. 인사담당자들은 이를 기반으로 기본적인 인사원칙에 따라 회의 자료를 만들었을 터였다.
이날 회의 역시 모든 회의가 그렇듯, 큰 틀을 정하고 세부적인 결정으로 진행되었다. 이날은 이조참의 허협이 찰방을 비롯한 각 역원에 근무하는 관료들이 음직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과거 시험 출신으로 채우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조판서 정대년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조판서 정대년이 작심한 듯 인사권을 휘두르려 했고, 이로 인해 여러 의견이 묵살되면서 회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각각의 안건은 회의 참가자들의 의견을 물어 진행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아 절차상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에 실무자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렸던 것이다. 이날 도목정사의 결과에 대해 재야에서 비판이 높았던 이유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리 임명의 강점은 이처럼 도목정사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데 있었다. 도목정사란 엄밀히 말해 서류를 기반으로 관직에 임용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기 위한 제도이고, 임명은 관리에 대한 임면권을 가진 왕만이 했다. 이 때문에 도목정사는 왕이 임명할만한 사람을 3배수로 추려서 추천하는 회의 성격을 가졌고, 도목정사의 의견은 3배수를 선정하고 그 순위를 정해 올리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필요한 자리 한 곳에 3명을 수망首望(1순위), 아망亞望(2순위), 말망末望(3순위)으로 정리해서 올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류는 망기望記 혹은 망단자望單子라고 하는데, 왕은 거기에 적인 이름을 보고 임명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에 점을 찍어 의사를 표했다. 이를 ‘낙점落點’이라고 했다. 대개는 수망이 낙점되었지만, 왕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망기에 오른 다른 인물을 낙점하기도 했다.
낙점이 되면 그 결과는 지금의 관보에 해당하는 조보에 실려 바로 공식화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임명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서경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했다.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인사청문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목정사와 왕의 낙점을 통해 선임된 관료에 대해 탄핵전문 기관인 사간원에서 다시 한 번 더 그 사람을 평가한 후 임명에 동의해 주는 절차이다. 많지는 않지만, 서경을 받지 못하면 관료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신에 사간원 관리들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도목정사에서 낙점, 서경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인사시스템은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도목정사는 ‘추천권’만 부여받음으로써 왕의 인사권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크다. 동시에 인사를 다양한 평가 시스템과 결부 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왕이 선택하게 한다는 의미 역시 함께 들어 있다. 특히, 인사를 망단자 안에서 선택하게 함으로써, 왕의 인사전횡을 막고 시스템에 의한 인사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왕의 낙점도 대간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필요가 없었다. 유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관료들을 평가하는 대간들에게 동의를 받지 못하면, 관료로서의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인사 시스템은 매우 촘촘하고 과학적이다. 각 단계가 지향하는 바대로만 이루어졌다면, 조선은 권력 간 견제를 통해 최고의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인물을 선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탐관오리가 넘쳐났고, 그러한 관료에 의해 비참한 삶을 살았던 백성의 삶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시스템보다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한 근거이다. 인사가 그야말로 ‘인사人事’인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조선의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추구했던 이상마저 인사의 영역으로 돌릴 수 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